중국 태산&곡부&청도 트레킹 1

2007. 7. 18. 18:38[포토 갤러리]/▒ 여행갤러리 ▒

중국 태산 (泰山, 1,545m)


산동성에서 가장 가 볼 만한 명산인 태산은 산동성 태안시 경내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체 봉우리는 해발 높이가 1545 미터로 산세가 웅장하여 "천하 제일 명산" "오악의 으뜸"이라고 불리운다. 중국의 명산들 중에서 태산의 위상이 제일 높아서 수많은 중국 사람들이 흔히 태산 등정을 자기 일생의 영광으로 간주한다. 태산은 중화민족의 심볼이요 유구하고 찬란한 동방문화의 축소판이다.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태산은 시경에서부터 칭송하는 시가 나오는 중국 최고의 명산이다. 최초로 태산에 올라가 봉선의식을 거행한 이는 진시황이었다. 그후 역대 72명의 황제들이 올랐던 태산은 중국인들은 물론 바다 건너 한국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렸다.
 
태산은 우리에게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양사언(楊士彦)의 시로 더 유명한 산이다.

 

泰山雖高是亦山(태산수고시역산) -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登登不已有何難(등등불이유하난)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世人不肯勞身力(세인불긍노신력)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只道山高不可攀(지도산고불가반) - 뫼만 높다 하더라


우리는 태산을 매우 높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태산은 해발 1545m로 지리산이나 백두산보다 낮고 오르기도 어렵지 않다.
태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산둥성의 타이안(泰安)으로 가야 한다. 태산 기슭까지 주택가와 상점이 들어선 풍경은 한국의 북한산이나 도봉산과 비슷하다. 태산 등반은 간단하다. 일천문(一天門)에서부터 정상까지 난 7,412개의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면 된다.

 

단조로운 이 길을 흥미롭게 해주는 것은 도교의 유적과 중국 역사의 발자취다. 도교 사원인 두모궁(斗母宮), 서왕모(西王母)를 모시는 만선루(萬仙樓) 등이 있다. 주나라 목왕이 천산산맥에 있는 천지(天池)에서 보았다는 전설이 서린 서왕모는 처음에는 죽음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반인반수의 흉칙한 모습이었으나 후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고, 불사의 약을 지닌 선녀가 됐다. 계속 한 두시간을 걸어 올라가면 태산 중턱의 중천문(中天門)이 나오는데 여기서 정상 부근의 남천문(南天門)까지는 케이블카가 있다. 그러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이라는 시조를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은 걷기를 계속한다.

 

매점들과 사진 찍어 주는 사람들을 지나치다 보면 오대부송(五大夫松)이 나온다. 진시황이 태산에 오르다 비를 피했다 하여 오대부란 관직을 부여받은 소나무이며,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가파른 계단이 시작된다. 숨이 차지만, 중간에 18개의 널찍한 판이 있어 잠시 쉴 수 있다. 여름 성수기 때는 가마꾼들이 돈을 받고 사람을 실어나르기도 한다.

 

이 가파른 계단의 끝에 남천문이 있다. 하늘에 거의 다다른 듯한 분위기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동남쪽 절벽 끝에 첨노대(瞻魯臺)가 보인다. 멀리 노(魯)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치의 병에 걸린 부모님의 치유를 기원하며 몸을 던지는 이가 있어 명나라 때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길 지나면 ‘하늘의 거리’인 천가(天街)가 시작된다. 현재 하늘의 거리에는 숙소와 기념품 판매소,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천가에서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넓은 들판과도 같다. 종종 구름이 끼면 마치 하늘의 세계를 거니는 것만 같다.

 

정상 부근에는 태산의 주신을 받드는 도교 사원인 벽하사(碧霞祠)와 거대한 돌에 글씨를 새겨 놓은 대관봉(大觀峰)이 있으며, 정상인 천주봉(天柱峰)에는 옥황정(玉皇頂)이 보인다. 그 부근의 무자비(無字碑)란 비석은 원래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 한무제가 2100년 전에 세웠다. 태산의 위대한 풍광에 겸손한 마음으로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고, 후세인들이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무자비를 지나면 바로 옥황상제를 모셨다는 옥황정인데, 여기서 역대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멋진 자연과 함께 이처럼 수많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가 깃든 문화 유적지에서도 태산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태산은 중국 5대 명산인 오악 중에서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악(東岳)이라고도 불리며, 그 중에서도 으뜸이라 하여 오악독존(五岳獨尊)이라 일컬어졌다. 동쪽은 모든 만물이 생성되는 방향이기에 태산은 가장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


>> 여행정보 <<

인천에서 산둥성의 성도 지난(濟南)까지 대한항공 직항편이 있다. 지난에서 타이안까지는 버스로 1시간30분. 태산을 일천문에서 걸어 올라가면 4∼6시간 소요된다. 빠르게 오르려면 기차역에서 3로(路) 버스를 타고 일단 천외촌(天外村) 종점까지 간다. 10분 정도 소요된다. 거기서 태산의 중턱인 중천문까지는 버스로 약 30분. 요금은 122위안.(태산입장료 100위안+차비 22위안) 중천문에서 남천문까지 가는 케이블카는 50위안. 걸어 올라가면 1시간30분∼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정상을 돌아보는 데는 약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정상에서 중천문까지 내려오는 케이블카는 오후 5시까지 운행한다. 중천문에서 천외촌까지 내려오는 버스는 오후 6시가 막차.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면 태산 정상의 숙소에 묵으면 된다. 중급 숙소는 한국돈으로 2만∼5만원. 고급 호텔은 10만원 정도. 타이안 시내에는 역대 황제들이 태산에 오르기 전에 제를 올렸던 대묘(垈廟)와 조선 사람인 만공(滿空) 스님이 세운 보조사(普照寺)라는 절도 있다.

 

 

공자(孔子)의 고향 곡부(취푸, 曲阜)

 

공자는 중국 고대의 저명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군사가였으며 세계의 문화사에서도 널리 이름을 날린 거인이다.
그가 주장한 어진 정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유가의 학설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봉건사회의 정통적인 질서로 확립되었으며 큰 영향력을 과시하여 왔다. 이에 후세의 사람들은 공자를 가리켜 "至聖先師" 또는 "萬世師表"라고 칭송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19세기 유럽에 전파되면서 유럽의 문화계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공묘/孔庙, 공부/孔府, 공림/孔林 <<

 

공자와 그의 학설을 기리기 위하여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 공묘, 공부, 공림을 만들어 일대의 성인인 공자를 기념하고 있다. 곡부의 도시 중심에 있는 이 三孔은 공자의 유적지를 개.보수한 동양식의 고전 건축물로 기세가 늠름하고 장엄하다. 공자가 타계한 후 2,400여년이 지났지만 공자의 학설은 오늘까지 중국과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三孔은 2,400여년간 유가학설을 숭상하고 공자를 존경해 온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유적지로, 깊은 역사문화적 가치를 갖고 있는 동시에 인류문화유산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되고 있어 국내외의 정치인, 사상가, 사회학자와 각계 인사들이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곡부의 공묘는 공자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싱가폴, 미국 등 여러 나라의 2,000여 곳에 널려 있는 공묘의 모델이 되어왔다. 기원전 478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2,400여년을 거쳐오는 동안 한 번도 제사를 거른 일이 없다.

 

이는 현존 중국의 고대 건물 중에서 제일 오래 된 건물이기도 하다. 공림은 중국에서 제일 크고 오래 된 가족무덤으로 공자의 가족편년사이기도 하다. 공부는 중국에 현존하는 가택과 관아 기능을 동시에 구비한 건물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제일 잘 보존된 건물이다.

 

三孔이 보존하고 있는 문물들은 역사, 과학, 예술적인 제 분야에서의 三孔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300여 건물의 1,300여 개의 방들은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각 시기의 건축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000여 개의 한나라 화상석과 공자의 일생을 그린 행적도, 그리고 용조각 기둥들은 또 조각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이밖에도 5,000여 개의 돌 비석에 새겨진 다양한 문자는 서예의 전당으로서의 위치를 충분히 설명해 줄 뿐더러, 중국 고대의 정치, 사상, 경제, 문화, 예술을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17,000여 그루의 고목은 기후, 기상학의 연구와 생태학의 연구를 위하여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0만 여점의 문물 중에서 원, 명나라 때의 의관과 공자의 초상화, 그리고 연성공과 그의 부인의 초상화, 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그릇이 제일 중요한 문물로 꼽힌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의관은 중국 고대의 복식과 방직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제공되고 있다. 공부의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의 가족문서와 당안 서류는 약 30만 부에 달하는데 이는 명 나라와 청나라의 역사, 특히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되고 있다.

 

이렇게 三孔은 공자를 기리는데 있어서의 중요한 상징일 뿐더러 또 중국의 문화와 역사, 예술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공묘, 孔庙>

공묘는 아주 성공적으로 설계된 건축물인데 앞은 신도이고 양 측으로 향나무를 심어 장엄하고 숙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주요건물은 중앙선을 따라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동,서로 대칭되고 있다. 앞으로부터 뒤로 가면서 순서에 따라 아홉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앞쪽으로 세 부분은 고목이 울창하여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울창한 고목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보고 있으면 공묘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더러 공자 이념의 심오함도 느끼게 된다. 건물들에 걸려 있는 간판들은 공자의 생전에 쌓은 덕을 칭송하고 있어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며 어느새 존경의 마음이 스스로 솟게 하고 있다.

네 번째 부분부터는 늠름한 건물들에 어울리게 노란 기와와 붉은 담, 푸른 나무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공자의 이념의 깊이를 한층 깊게 반영하고 있으며 공자의 위대한 업적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유가학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은 동서의 길이가 166M인데 이 숫자의 음은 중국어로 길이 길이 전해 진다는 뜻으로 유교학설의 세세대대로 전해 질 것을 바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공묘는 100여 개의 가옥에 460여 개의 방으로 이루어 졌는데 고전 건축물이 차지하는 면적은 6000여 ㎡에 달한다.

 

주요 건축물들로는 금, 원나라의 비석 정자, 명 나라의 규문각, 행단, 덕양천지방, 청나라 때 보수한 대성전과 침전 등이 있다. 정전은 낭하로 에둘러 쌓여 있는데 이는 송나라와 금나라 때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었던 봉페 식으로 지어진 사당의 대표적인 유물이기도 하다. 대성전, 침전, 규문각, 행단, 대성문 등 건물은 나무와 돌의 혼합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비교적 보기 드문 현상이다.


공묘에는 한나라 이후의 비석 조각 1,044점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런 비석들에는 고대 제왕들이 공묘를 참배하고 제사를 지냈거나 공자의 후손을 책봉한 데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이밖에도 일부분은 여러 문인 묵객들이 남긴 제사도 있는데 이런 제사들은 각각 한문, 몽골문자, 만주문자로 되어 있으며 다양한 서예의 방법으로 쓰여져 있는데 봉건사회의 경제, 문화, 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되고 있다.

 

공묘에는 한나라 때부터 여러 시기에 걸친 기념비들이 다량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고대 서예예술의 전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묘에서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돌 조각 예술품으로 한나라의 화상과 명, 청 시기에 만들어진 돌기둥, 그리고 명 나라 때 만들어진 聖迹圖를 들 수 있다.

 

90여 점의 한나라 화상들은 제재가 풍부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잘 그리고 있으며 역사이야기나 신화, 전설에 대한 내용을 그리고 있다. 조각의 문양은 깊은 부분과 옅은 부분, 거칠음과 깔끔함 등 여러 예술형식이 서로 잘 어울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대성전 앞에 있는 10개의 돌 기둥으로 이 돌 기둥은 높이가 10M이고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생동한 용을 조각하여 높은 예술적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성인의 행적도는 모두 120폭의 그림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성인 공자의 일생을 그린 중국에서 제일 일찍 만들어진 대형계열그림으로 높은 예술적인 가치와 사료적인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2,000여 년을 내려오는 동안 공묘는 끊임없이 보수, 확대되면서 한번도 버림을 받은 일이 없었다.

 

三孔은 국가의 보호로 원래의 개인주택에서 한 차원 높은 단계에로 발전하여 제왕 궁궐 식의 규모를 갖춘 건축 군으로 되었으며 이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년륜을 새겨온 인류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하나의 사례이다.

 


<공부, 孔府>

공묘의 동쪽에 있는 공부는 공자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자택이다. 역대의 제왕들은 공자를 기념함과 동시에 그의 후손들에 대하여 은총도 많이 베풀었었다고 한다. 기원전 195년에 공자의 제 9대의 후손이 제왕으로부터 봉제군으로 책봉 받으면서 그의 후손들은 이 관직을 세습하게 되었다. 송나라 1055년에 제 46대 후손이 연성공으로 책봉되면서 이 관직은 줄곧 세습되어 제 77대에까지 이어져 왔으며, 이는 중국의 가족사에서 제일 오랜 귀족 가족사로 되었다.

 

공자의 후손들은 계속 공부에서 살고 있었는데 1377년에 독립된 연성공부를 새로 지었고 이 연성공부는 1503년에 새로 확대되었다. 이 곳은 세 갈래의 길로 나뉘어 있는데 모두 170개의 건물에 560여 개 방으로 되었던 것이 지금은 152개의 건물에 480개의 방만 남아 있다. 대문, 의문, 대청, 둘째 홀, 셋째 홀, 내택문, 영은문, 가묘는 명 나라의 건축이며 나머지는 전부 청 나라 때의 건축물이다. 건축군의 면적은 12740㎡이다.

 

공부에는 여러 가지 문물들이 많은데 이런 문물들은 역대의 제왕들이 공자를 기념하고 공자의 후손들에게 하사한 물품들이다. 문방4우, 어제시편, 예기와 악기 등 여러 가지 문물들이 있으며 이런 문물을 하사 받은 공자의 후손들도 그것을 잘 보존하여 훌륭한 문물 박물관을 만들었다.

 


<공림, 孔林>

공림은 孔氏의 가족무덤으로 曲埠시의 북쪽에 위치하여 있다. 면적은 200만㎡로 무덤과 기념비석과 고목들이 많다. 공자와 그의 후손의 무덤이 약 10만 여 개가 있으며 한나라의 기념비석이 공묘로 �겨 진 것을 제외하고 송 금, 원, 명, 청 시기의 기념비석이 약 4,000여 개가 남아있다. 이 밖에도 송, 명, 청 시기의 돌로 된 말, 양, 사자, 기둥 등이 있으며 유가의 이념을 널리 기리고 제사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문, 방, 정전 등이 이곳 저곳에 널려 있다.

 

공림에는 공자의 직계자손 76대, 방계자손은 78대까지 묻혀 있는데 주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각 시기의 후손이 모두 있다. 무덤의 수효는 늘어가고 있으며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런 대형의 가족무덤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사례이다. 이는 장기간의 중국 봉건사회에서 유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중국의 장묘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고대의 정치, 경제, 문하, 세시풍속, 서예, 예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칭다오 (靑島, Tsingtao)
 

중국 산둥 성[山東省]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지구급(地區級) 시이다. 중국 북부에서 제일 가는 천연항 가운데 하나로, 산둥 반도 남쪽 해안에 있으며 자오저우 만[膠州灣] 동쪽 어귀에 있다. 이 만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 때로 얼어붙기도 하지만, 대형 선박은 언제나 드나들 수 있다.

 

칭다오는 본래 즉묵현(卽墨縣)에 속한 보잘것없는 어촌이었으나, 청대(1644~1911)에 칭다오커우[靑島口]라는 세관이 세워지면서 대규모 정크 무역이 발전했다. 1880년대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창설하면서 중국 정부는 칭다오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곳에 소규모 해군 보급기지와 요새를 설치했다. 1897년 이 지역에 눈독을 들여온 독일 정부는 자국 선교사 피살사건을 구실로 군대를 급파해 칭다오를 점령했다. 1898년에는 중국 정부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요구했고, 산둥의 철도경영권과 광산채굴권을 포함해 자오저우 만과 그 주변지역을 99년 동안 조차해주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따라 칭다오는 1899년 자유항으로 선포되었고, 근대식 항구시설도 들어섰다. 또한 지난[濟南]까지 이어지는 철도도 놓였다. 칭다오는 유럽풍의 근대적 도시로 설계되었으며, 여러 공장들도 들어섰다. 멀리 남쪽으로 장쑤 성[江蘇省]에 있는 새 항구 롄윈 항[連雲港]까지의 해안무역을 관장하기 위해 제국해관(帝國海關) 지부가 칭다오에 세워졌다. 1914년 일본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도 무엇보다 칭다오를 확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1914년 11월 일본은 이 항구를 봉쇄한 뒤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1922년 워싱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중국에 반환할 때까지 이곳은 일본에 점령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간 동안 칭다오뿐만 아니라 산둥 성 내지에도 강력한 거점을 구축해두었다.

 

1929년 칭다오는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효과적인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이어 특별시가 되었다. 항구로서 계속 발전한 칭다오는 1930년 무렵에는 교역량에서 경쟁 항구인 톈진[天津]을 압도했다. 그후에도 톈진을 누르고 계속 성장했다. 1938년 일본이 다시 칭다오를 점령하여 1945년까지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산업 발전이 이루어졌다. 1941년까지 칭다오에는 근대식 면방직공장, 기관차·열차 제작소 및 수리공장, 기계수선소가 세워졌으며, 고무·성냥·화학약품·염료 등을 제조하는 공장도 들어섰다.

 

양조공장에서는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맥주가 생산된다. 1949년 이래 칭다오는 주요 중공업기지로 발전했다. 1970년대까지는 과거에 많이 제조되었던 직물이 기계공업과 함께 경쟁적으로 발달했다. 1950년대말 중국에서 으뜸 가는 주요철강공장이 이 지역에 세워졌다. 칭다오는 동서를 잇는 철도 노선의 종착역으로, 옌타이 항[煙臺港]과 철도로 이어져 있다. 큰 어항이기도 하며 중요한 농업 중심지이기도 한 칭다오에는 산둥대학교, 칭다오 기술연구소, 칭다오공과대학, 해양연구소 및 그밖의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태산 정상을 배경으로

 

태산 입구

 

중국인들과 함께

 

곡부에 있는 공자 사당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