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23. 17:42ㆍ[사람과 향기]/▒ 자연의향기 ▒
해마다 다르게 스며들지요 | |
어린놈이었다. 그랬기에 자전거에 몸뚱이를 싣고 남으로, 남으로 내달릴 무모함을 지녔으리라. 침낭 하나 없이 소주 몇 병 싸들 고 집을 나선 지 어언 며칠째, 나는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지겹도록 달렸으며, 지치도록 달렸다. 머릿속 가득 생각을 짊어지고도 달렸고, 그저 멍하게 페달을 저어 수백 리를 나아가기도 했다. 그때 내가 품었던 복잡한 고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지금 하지 않으면,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했을 뿐이다. 밤이면 어쭙잖은 방랑객 흉내를 내며 기차역 대합실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하고, 동이 트면 다시 달렸다. 지나는 짐차를 얻어 타기도 수차례였다. 누군가 를 만나러 가는 길, 그는 천 리하고도, 이백 리나 더 떨어져 있었다.
그해 여름의 새벽, 진주역 앞 공중전화를 붙들고 나는 말했다.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방학의 끝자락이었으므로 곧 서울에서 만 날 테지만, 그래도 한번 보자고. 첫차를 타고 나온 그녀가 꾀죄죄한 내 몰골을 훑어보며 내민 것은 박카스였다. 헌데 내용물이 달랐다. 아버지 방에서 몰래 담아 온 양주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진주역 공터에 자전거를 매어두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얘기하다 졸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커 다랗고 빨간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해대교였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째 바뀌고 있으니 시간은 자전거보다 빠르다. 나는 해마다 남해를 오갔다. 어느 해던가, 남해대교는 칙칙한 빛깔로 옷을 갈아입었고, 빨간 다리의 속삭임이 사라진 탓인지 설 렘도 줄어들었다. 우리의 모든 일상사가 그러한 것처럼, 십여 년 사이 남해도 많이 변했다. 육지를 이어주는 큰 다리가 하나 더 놓 였고, 그것은 오가는 이들이 늘었다는 반증이자, 오가는 이들을 더 늘려보려는 욕망이기도 했다. 섬이라고는 해도, 한반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보니 볼 것도 많고 놀 곳도 많다지만, 만사가 귀찮은 나는 늘 처가가 있는 미조 포구를 맴돌았다. 그러므로 내게 남해는 곧 미조 포구이기도 했다.
저 너머 작은 섬은 바다로 가로막혔다. 허나 반나절뿐이었다. 바다는 성큼성큼 뒷걸음질 쳤다. 그가 물러난 자리에 길이 났다. 어 찌 시간대를 알고 찾아왔는지 갑자기 사람들이 북적댄다. 저마다 장화 신고, 비닐 옷 덮어쓰고, 호미를 든 채. ‘모세의 기적’이라는 광고 문구는 거슬렸지만, 섬을 향해 열린 갯길은 작고 아름다웠다. 물이 빠진 갯벌은 언뜻 시체 안치소처럼 보인다. 온통 죽은 소라와 조개, 게 따위다. 허나 잠시 바라보면 무언가 꼬물댄다. 흡사 ‘매직아이’처럼 마구 흐물거린다. 모든 죽 은 것들 사이로, 모든 산 것들이 꿈틀대는 것이다. 갯물에 맨발을 넣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들이 발가락을 꼬집고 더듬어댄 다. 너, 살아 있거든! 산 것이 산 것에게 주는 은밀한 따끔거림은 차라리 선물이어라.
연간 수만 명이 마을을 찾는다고 하니 문항마을 갯벌체험은 꽤나 알려진 모양이다. 아이들과 조개를 잡고, 쏙을 낚아채는 체험은 이 땅의 모든 부모가 바라는 산 교육임에 틀림없을 테지만, 모든 걸 교육 프로그램으로 환원시키려는 그 엄청난 전투력은 대개 조급증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적어도 바다 앞에서는. 바다는 느리다. 느린 것은 죽은 게 아니다. 바다가 물러간 갯벌에서 잠깐 조개를 잡고 간 아이들이, 다시 성큼 다가온 바다를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같은 곳이건만, 풍경은 이렇게나 달라지는데…. 내게 바다는, 해마다 달리 스며들었다. 바다를 품을 깜 냥이 되지 못하니 그저 스며든 바다 맛이나 볼 따름인데, 해마다 다르니 바다가 변화무쌍한 탓인지, 내가 도섭스러운 탓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긴 우리가 아는 게 무언가. 어린 객기로 꾸역꾸역 기어들어왔던 남해바다가, 내게 이리 될 줄 누군들 알았던가.
사진·글 노순택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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