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밭’에 빠진 ‘이외수’를 위한 구원.

2009. 7. 8. 13:29[사람과 향기]/▒ 삶 의 향 기 ▒

‘개똥밭’에 빠진 ‘이외수’를 위한 구원.
강목어 (kmoka) | 07.08 10:40


1. 학창시절 나에게 ‘이외수’라는 이름은 ‘희망’이고 ‘위로’였었다.

 

 


학창시절 나에게 ‘이외수’라는 이름은 ‘희망’이고 ‘위로’였었다.


‘이외수’ 작가의 ‘꿈꾸는 식물’, ‘들개’같은 작품들을 보며 지금 비록 현실은 춥고 배고프지만 숭고한 예술혼으로 참고 견디면 그것이 결국에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값진 결실을 맺게 되고 그런 삶이 더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 했었다.


작가 자신도 그러하지만 그의 작품 주인공들 역시 이 사회의 주류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세상의 모진 불행과 아픔을 처절히 온몸으로 견딘 끝에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진한 삶의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불행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 했던 그 시절의 나와 내 또래 친구들은 ‘이외수’의 작품들을 통해 우울한 오늘을 참으며 내일의 희망을 꿈꾸곤 했다. 물론 그의 작품과 비슷한 감성을 가진 락그룹 '들국화'의 노래나 '이현세'의 ‘까치’를 보며 힘겨움 속에서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을 되새겼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노래나 만화는 ‘대중 문화’였고 ‘이외수’의 작품들은 ‘순수 예술’로 인정 했기에 보다 특별한 의미로 각인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들국화'의 노래 '행진'이나 '그것만이 내세상'이 힘겨운 삶에서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간절한 희망을 절규처럼 가슴 속을 울리며 파고들었듯, '이현세'의 '까치의 제5계절', '고교 외인부대', 공포의 외인구단'등이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끝내 세상과 당당히 맞서는 자들의 뜨거운 삶을 보여 주었듯, '이외수'가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단순한 재미난 소설이 아니라 한차원 높은 곳에서 들려주는 ‘순수한 영혼’의 울림이었다. 삶이란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희망이며 간절한 열정이 있으면 별 볼일 없는 세상의 삼류들도 충분히 아름다울 있다는 삶의 진실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 시절, 마치 그 작품들의 주인공처럼 몇 번을 울면서도 내일의 희망을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이외수’작가가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라는 에세이에 고백했듯 ‘도를 닦듯 굶으며’, ‘죽고 싶은 심정’ 속에서도 글을 써 결국에는 ‘축 당선’이라는 통지를 받은 것처럼 그 어떤 어둠 속에서도 꿋꿋이 내 삶을 채우면 결국엔 희망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고 ‘아름다운 열매를 익게’하기 위해 ‘그 희망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직까지도 살아 있고’, 그때를 ‘기다리고’, ‘반드시 보여주겠다’는 그의 순수했던 열망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가. 감수성 예민하던 설익은 십대, 이십의 나에게 그 소설 속 주인공들의 ‘희망’과 ‘예술적 성취’에 대한 간절한 노력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처럼 눈물겹게 애절 해야 ‘위대한 작품’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가슴 뭉클했던 가.


그래서 돌이켜 보면 ‘눈물겨운 시대’, 가난하던 시절을 보내던 나와 우리들에게 ‘이외수’의 작품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독자들보다 더 지독하게 외롭고 가난한 작가와 주인공들을 통해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2.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까지도 초월했지만 그를 ‘비겁자’로 욕하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세월은 지났고 세상은 변해갔다. 나 역시 나이를 먹고 어느덧 ‘어른’이라는 것이 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꿈만 갖고는 살수 없고 더 이상 ‘순수’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어 과거의 ‘순수’를 단지 ‘추억’이나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외수’를 만났다. 하지만 그 예전의 내가 아직 그대로이지 않듯이 더 이상 그 예전의 ‘이외수’도 그 시절의 ‘이외수’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넘어 TV 시트콤 출연과 라디오 진행을 넘어 주말 예능 프로에도 자주 출연하시는 만능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낀 감정은 그 예전 같은 존경이나 부러움이 아닌 씁쓸함이었다. 이건 그가 마치 ‘시골 고향집이 예전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과거에 기억은 그냥 그대로 머무르길 원하는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큰 유명인이 되고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에 대한 질투도 아니다. 그건 단지 그의 삶이나 작품에서 더 이상 감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의 기준으로는 그러하다.)


그는 여전히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시고 최고 권력자에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아 수많은 네티즌이 열광하는 ‘스타 작가’이신데 무슨 말씀이냐고 반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 분이 최고 권력자에 쓴 소리 하는 것도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이 부분은 오해가 있어서 미리 밝히는데 나의 정치 성향 때문이 아니고, 즉흥적인 생각도 아니다. 그 예전부터의 생각이다. )


우선 작가의 작품 연보를 살펴 보자. 1975 《세대》에 중편소설 「훈장」으로 데뷔, 1978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1980 소설집 『겨울나기』, 1981 소설집 『장수하늘소』 장편소설 『들개』, 1982 장편소설 『칼』, 1983 우화집 『사부님 싸부님 1, 2』, 1985 에세이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1986 에세이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1987 시집 『풀꽃 술잔 나비』 를 출간 하였다.(‘이외수’ 홈페이지 작가연보 참조. http://www.oisoo.co.kr/) 이 작품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이 작품들의 이미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인간의 감성과 순수 예술의 절대 가치를 추구해온 작가이다. 흔히 말하는 ‘참여 문학’이 아닌 ‘순수 문학’인 것이다.


최근 신작 “청춘불패 (이외수의 소생법)”를 출간한 출판사의 작가소개에서도 보여지듯 “독특한 상상력, 기발한 언어유희로 사라져가는 감성을 되찾아주는 작가 이외수. 특유의 괴벽으로 바보 같은 천재, 광인 같은 기인으로 명명되며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문학의 세계를 구축해 온 예술가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추구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술의 힘임을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작가이다.


그래서 혹독한 가난만큼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 다른 작가들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이나 “붉은 방(임철우)”, “노동의 새벽(박노해)”이란 작품을 쓰는 시절에도 그가 원래 ‘순수 문학’을 하는 작가이고 ‘현실을 뛰어넘는 도인’ 같은 작가라고 생각 했기에 그의 작품에 그 어떤 사회적 책임감이나 시대의 모순과 비리도 기록하지 않고 모든 현실을 초월한 듯 한 작품들을 썼어도 그를 ‘비겁자’나 ‘의식 없는 ’작가라고 욕하지 않았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 ‘들개’의 작가의 말에서도 “나는 좀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정교과서식의 공부가 아니라 장자莊子식의 공부다.”라고 ‘탈현실적’ 세계관을 보였었다. 그래서 그렇게 노자처럼, 장자처럼 현실을 초월한 듯 사시기에 박정희, 전두환 독재자 밑에 사시면서도 아무 말씀 안 하셔도 그의 순수함을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인정했었다.


 
3. ‘독재 권력’과 싸우는 ‘이외수’가 아닌 고작 ‘악플러’와 싸우는 ‘이외수’를 보는 답답함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민주화 되시면서 이 분께서 갑자기 ‘MB’ 당선 이후부터 갑자기 그 예전의 ‘순수’와 ‘현실 초월’을 잊어 버리시고 ‘현실 참여를 하시기 시작 하셨다.


이 부분은 ‘MB’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간을 떠나 나에게는 다소 의외이고 위선적으로 보여진 것이 사실이다. – 그 예전 ‘이문열’ 작가도 군부 독재 시절에는 ‘순수 문학’을 주장하시더니 시대가 바뀌고 말을 바꾸어 작가가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주장을 하신바 있으셔서 진보적 독자들의 큰 비난을 받은바 있다. 작가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분명 태도를 바꾼 건 이중적 자기 기만임은 분명하다. 본 필자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두 작가의 변화를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다. 왜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권력에 대해 침묵했던 분들이 갑자기 권력자에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지를 알고 싶다. 무소불위의 막 나가는 권력자에게는 입 다물던 현실 인식이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나 역시 이해한다. 그 누구도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에게 함부로 바른 말을 하지는 못한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과거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침묵을 강요 당하는 시대에 용감히 맞서 싸운 민주 투사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그들을 인정하고 그 뒤에서 그 뜻을 기리고 따랐을 것이다. 그것이 양심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자기 반성도 없이 다 차려진 ‘자유와 민주’의 밥상 위에 숟가락을 올리고 과거 희생 했던 분들은 저 뒷 자리에 아직도 굶고 앉아있는데 먼저 앞장 서 용감히 수저질을 한다. 이제 사람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열광한다. 할말은 하는 사람, 눈치 안 보는 사람, 양심적인 사람, 의식 있는 사람…이런 모습을 볼 때 세상이 억울하고 안타깝다.


그렇다. 크게 이해하자. 그 과거에 ‘자유와 민주’를 위해 앞장 서 희생하고 싸우지 못했으니 그 미안함에 지금이라도 뒤늦게 나서 민간 독재에 맞서 싸운다 치자. 그런데 싸우려 똑바로 싸워야지. 적과 싸우면서도 적의 동맹군과는 사이 좋게 지낸다? ‘MB’를 비판하면서도 ‘MB’의 동료 ‘조중동’에는 자기 아픔을 하소연(?) 하는듯한 지금의 태도는 도대체 뭔가?


단지 ‘조중동’에 인터뷰를 했다고 그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소신을 밝힐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본질이 문제다. 지금 이 시기는 미디어법 개정으로 네티즌 죽이기에 몰두하는 ‘조중동’의 전략에 따라 그에 맞는 인터뷰 감을 선택한 것이 본인이라는 것을 진정 모르는가?


모른다면 답답한 거고 알고도 응했다면 비양심적인 거다. 최소한 ‘MB’를 비판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감도 없이 인터뷰를 하면서 무슨 옳고 그름을 따지며 세상을 가르치고 권력자를 비판하나.


지금 수많은 국민들이 독재의 부활을 두려워하고 그에 맞선다는 수많은 시국선언이 나오는 지금 과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고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아무리 악플러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그런 못된 인간들 버릇을 고쳐준다고 하지만 지금 그런 문제로 ‘조중동’ 인터뷰를 하는 그를 이해해주기에는 그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컸었다. 그를 더 큰 사람이라 믿었기에 ‘독재 권력’과 싸우는 ‘이외수’가 아닌 고작 ‘악플러’와 싸우는 ‘이외수’를 보는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과거 독재 시절의 침묵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치고, 힘없고 가난하고 춥고 배고픈 그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치고, 영혼이 맑은 그라 그런 일은 어울리지 않아 뒤로 빠졌다 치고, 선계에서나 어울릴법한 사람이기에 당연히 현실을 외면해야 하는 그이기에 오랜 독자인 나는 그를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힘 없지도 않고 춥고 배고프지도 않는데 별로 선계에 어울릴 법 하지도 않고 아주 적극적으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그가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려는 이때 그는 ‘악플러’와 가열찬 투쟁(?)을 하려 한다. 지금껏 그를 이해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그를 이해하기 어렵다.

 


4. 이제는 더 이상 ‘이외수’라는 이름이 ‘감동’이 되지 않는 이유.


그래, 더 크게 생각해 그것도 ‘순수한 사람’이다 보니 그럴 수 있고, 정치적 입장 변화나 현실에 대한 참여나 순수냐에 대한 생각 변화는 있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작가의 현실 참여에 대한 정도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기 시작 했다. 좋게 말하면 발전이나 변화고 나쁘게 말하면 현실에 휩쓸리는 건데 그것에 대한 평가는 그 행위의 ‘진정성’과 ‘결과물’로 판단 되어질 것이다.


지금껏 ‘이외수’가 보여주는 현실 참여적 모습은 TV 시트콤에서 애꾸눈을 하고 연기를 하는 모습이나 통신사 CF의 멋진 패션을 자랑하는 예능인, 그리고 가끔 권력자에게 한마디씩 하는 유명인 등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볼 때 마다 남들은 감동과 재미를 느낄지 모르지만 필자는 자꾸만 이상하게 ‘이외수’가 불쌍하게만 보인다. 그가 과거 그 배고픔 속에 피눈물을 삼키며 ‘들개’란 작품을 냈을 때는 정말 대단해 보였는데 애꾸눈 ‘이외수’는 그리도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는지는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건 최소한 그가 보여주는 지금의 ‘화려한 성공’은 나에겐 ‘초라한 성공’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모든 것에 초월한 선인 같은 모습으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한 듯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 느껴지는 ‘이외수’는 ‘시대 분위기’에 영합하거나 ‘시대 흐름’을 적절히 잘 타고 있는 영리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남들은 ‘이외수’가 툭하면 TV에 나올 정도의 유명인이고 베스트 셀러 작가라 환호할 수도 있지만 나는 대단하기 보다 진짜 자기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사람으로 느낀다.


본인과 주변 사람들은 유명 스타가 되어 행복할지 모르지만 나는 참 그렇게까지 세상 속에 유명인으로 살고 싶으냐고 묻고 싶다. 아무리 살면서 이것저것 다 경험해보면 좋고, 소설가에, 영화에, 드라마, 라디오, CF 출연까지 다해보고 세상과 소통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되고 싶고, 결국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 독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했는지 묻고 싶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나 같이 오래된 독자가 ‘겨우 이거였나’, ‘아무리 대중과 가까워 졌고’, ‘뭐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만 왠지 억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고 처량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


사람은 원래 나이를 먹으면 체력이 떨어지기에 젊은 시절과 같은 노동력으로 돈을 벌기보다는 자기 이름값이나 연륜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 점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자기 이름을 팔아 돈을 번다고 자기의 본질과 품질까지 떨어트려 팔면 안 된다.


유명 명품 브랜드가 있다. 그 제품이 명품이라고 신제품을 남발하며 질 낮은 원재료로 큰 수익을 챙기면 그 브랜드는 결국 명품의 가치를 잃고 평범한 브랜드로 전락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유명 작가가 자신이 유명하다고 자신의 이름 값으로 마구 신작을 내면 결국에는 대단한 작가에서 평범한 작가로 떨어진다.


아무리 많이 팔렸다지만 정말 책을 사랑하고 예술을 음미하는 분들께 객관적으로 여쭙고 싶다. 만약 ‘이외수’ 작가의 최근작 '하악하악'을 어느 대학생이나 다른 무명 작가가 출간 했다면 수십만부가 팔렸을까? 솔직히 수만부라도 팔렸을까? 단지 ‘이외수’라는 이름값으로 팔은 거라고 보는데 그럼 과연 그런 자기 이름값으로 수십만부 팔았다고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이 정말 떳떳할까?


예를들면 어느 철없는 신세대 작가가 ‘이외수’ 작가처럼 비슷한 내용, 비슷한 포맷으로 단지 톡톡 튀는 내용으로 자기 싸이 홈피에나 올린 짧은 글 모아서 수십만부 팔았다면 세상에 평가가 어땠을까? 왜 그 예전 ‘귀여니’라는 신세대 작가는 수많은 비판을 받았을까? 과연 '하악하악'을 쓰신 ‘이외수’ 선생님은 요즘 철없다고 비판 받는 신세대 인터넷 작가들의 가벼운 작품들을 혼내실 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하는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악의에 찬 악플러로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책 내용이 꼭 길다고 좋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詩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용의 양을 떠나 그 질이라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 질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객관적이다. 불경이나 도덕경, 장자 등의 고전은 그 내용이 짧아도 세상의 진리와 법칙을 아주 함축적으로 심도 있게 핵심을 전달해주고 깊은 감동이 있다. 그래서 수천년이 지나도록 세상에 이어지고 전해진다. 아무리 짧은 내용이라도 인정 받는 것이다. 그런 수준의 글이라면 아무리 짧아도 이해해준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길게 풀어 놓아도 별 감동이 없는 글이 있다. 수십만부 팔린 '하악하악'은 과연 수천년이 아닌 수십년, 수백년 이어지는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악하악'에 대해 작가는 어느 방송에서 ‘너무 빈 공간이 많아 장수 채우기’라는 불만에 대해 ‘여백의 미’고 ‘그것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식의 선문답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맞다. 여백의 미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사실 논어나 장자, 불경에서 그런 여백의 미를 느꼈다. 비록 한 페이지에 2, 3줄이 적혀도 그런 압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무감한 탓인지 도대체 그의 작품에서 그런 ‘여백의 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감동과 아름다움은 읽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과거에 그의 작품에서 느꼈던 감동을 지금의 그의 책에 느낄 수 없다. 단지 말 장난 같은 가벼움을 느낄 뿐, 삶의 진중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외수’라는 작가에게 단지 재치, 재간만을 기대하기에는 그의 과거 작품들이 너무 아깝다.


아주 가슴 뭉클한 진한 감동을 받았던 작가에게서 이제는 보나 안보나 별 차이가 없는듯한 작품을 보는 아쉬움. 마치 연예인 토크쇼를 보는듯한 재미는 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그의 작품에서 남들은 세련미와 연륜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난 아직 부족해서인지 단지 씁쓸함만을 느낀다.



5. ‘개똥밭’에 빠진 ‘이외수’를 위한 구원은 무엇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 때문에 이제 더 오래 작품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더 빨리, 더 많이 자신의 작품을 알려야 하겠기에 비슷비슷한 아류의 다작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는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꿈꾸는 식물’, ‘들개’와 ‘칼’을 쓴 작가가 아닌가.


그 동안 ‘이외수’라는 이름으로 큰돈 없어도 잘 살았고, 이제는 화천에 근사한 집 짓고 살지 않는 가. 그리 인정받으면 되지 장자의 무위자연을 말하신 분이 뭐가 그리 아쉬움이 많으신 걸까.


아무리 본인은 아니시라고 해도 그것이 애처롭듯 이제 ‘이외수’님은 점점 대중들에게 더 많은 작품을 팔기 위해 방송을 뛰고 작품을 출간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것이 안타깝고 애처롭다. 차라리 당분간 작품을 내지 않아도 좋다.


‘이외수’ 작가님이 과거에 외롭고 불쌍했고 배고픈 거 안다. 그런데 그 예전부터 ‘이외수’ 작가님 별로 안 외롭고 안 배고픈 것으로 보여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자꾸만 홈피에 끄적거린 듯한 글들 모아서 작품이나 내고 언론 심하게 타시면 사람들 마음 속에서 과거의 ‘이외수’가 ‘예술가’라면 지금의 ‘이외수’는 ‘예능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꿈꾸는 식물’이라는 작품에서 돈에 환장한 주인공의 아버지처럼, ‘장수하늘소’의 "야마다, 현금을 준비하라"고 말했던 주인공처럼 독자들에게 현금을 준비해 책을 사라는 장사꾼으로 비춰질 수 있다.


작가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부자 될 권리도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다. 글을 잘 쓰다 보면 돈을 벌 수도 있지만 돈을 잘 벌기 위해 작품을 쓰면 작품도, 사람도 추해진다. 지금 ‘이외수’ 작가는 열심히 작품 하며 잘 버는 작가일까, 아니면 잘 벌기 위해 열심 쓰는 작가일 까. 그 작가를 사랑했었기에 이런 물음을 갖는 것 자체가 아쉽다.


이제 ‘장자’를 말하던 ‘이외수’는 이유야 어째건 이 속세의 더러운 ‘개똥밭’에 몸을 담으셨다. 그리고 최근 들어 ‘악플러’와의 논쟁 끝에 결국 ‘악플러’가 퍼부은 ‘개똥’을 온 몸에 묻히고 ‘개똥 구덩이’에 빠진 모양새다. 선계에 사시는 것 같은 양반이 ‘개똥밭’에 같이 뒹굴며 똥물 안 튀길 원하는 것이 우습지만 이제라도 ‘개똥밭’이 왜 ‘개똥밭’인지 아시면 된다. 그리고 ‘개똥’ 묻히기 싫으시면 ‘개똥밭’에서 나가시면 되겠다. ‘개똥밭’에 계시면서 자꾸 자기에게 ‘개똥’ 튄다고 하소연 하면 옆에서 보는 사람도 답답하다.


그리고 이왕 ‘개똥밭’ 구경 하시고 ‘개똥’ 묻히신 김에 한가지만 더 아셨으면 좋겠다. 위의 3번 글 때문에 한말씀 드린다. 그런 인신공격과 비아냥 ‘개똥’으로 치면 그 예전 ‘노무현’ 대통령은 ‘개똥밭’에 ‘똥물’을 뒤집어쓰다 못해 결국 ‘똥물’에 내던져져 그 ‘똥물’ 죄다 치우려다 결국엔 거기에 깔려 죽은 억울한 사람이다. 그러나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며 모두를 용서하고 그것 조차도 삶이고 자연의 일부라 했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무위자연’이다.


지금 ‘개똥밭’에 한쪽 발이 빠진 ‘이외수’ 작가에게 ‘구원’은 무엇일까?


의외로 그 답은 정반대 방향에서 연일 막무가내 돌격 정신으로 보수계에 큰 이름을 날리시는 ‘김동길’ 박사의 저서 "떠날 때와 죽을 때"라는 책에서 배우면 된다. 그 책을 보고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비록 ‘김동길’ 박사는 자신의 저서 내용과는 전혀 틀린 삶을 살고 계시지만 그렇게 살면 된다. 그 내용 일부를 간단히 소개한다.


“떠날 때 떠날 줄 알고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아야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가 있다. 자리를 훨훨 털고 일어서지 못하는 지나친 욕심은 때아닌 죽음을 강요하는 독약이나 다름 없다. 한 자리 하는 능력도 대단한 능력이지만, 적당한 때 그 자리에서 물러날 줄 아는 능력은 더 대단한 것이다.”


*상세 내용 읽고 싶으시면 마우스 클릭 : http://blog.naver.com/uaok/100016130256


그토록 절실하고 눈물겹다던 ‘이외수’ 작가가 이제는 더 싱상 절실하지도 눈물겹지도 않다. 이젠 거의 정반대로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수준이다. 물론 더 이상 그 ‘이외수’ 작가에게 고통과 눈물을 권하지 싶지는 않다. 그 시절의 고생으로 충분히 된 거다. 그러나 최소한 작가고 예술 한다는 사람으로써 자기 작품의 가치를 영원히 남기고 싶다면 이제 그 자신 말대로 장자莊子식의 삶을 권하고 싶다. 장자는 굳이 억지로 고생하라고 하라지도 않았지만, 굳이 세상 밖에 나가 명예나 이름을 구하려 애쓰지도 말라고도 하셨다.


비록 이런 독자의 비판이 서운하시겠지만 오랜 독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이제 그만 하셔도 된다. 부디 물 좋고 공기 좋은 화천군에서 신선처럼 사시길 바란다.


“이제는 나이 먹고 힘들어 그 예전처럼 치열하게 작품 못하겠다”고 말씀 하시며 그냥 편안히 유유자적하게 사시면 과거의 그 멋진 작품도 그대로 남고 힘든 삶을 사는 이들에게 여전히 ‘희망’과 ‘위로’가 되실 것이다. 부디, ‘만능 엔터테이너 작가’보다는 ‘아름다운 예술가’로 남으시면 좋겠다.

 


덧붙힘:


*내 인생 처음으로 ‘악하지 않은 자’에게 비판의 글을 쓴다. 나 역시 나이를 더 먹으면 후배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까 두렵다.


*최근 ‘조중동’ 인터뷰를 탓하기에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예전에 초고를 썼고 혹시나 해서 마무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때가 되어 마무리 하는 것 뿐이다.


그나마 성공한 사람치고 드물게 보수정권에 맞섰다는 것은 나름대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 어설픔을 이유로 모든 것을 부정 할 수는 없다.)


*이 글에 대해 ‘이외수’의 첫 작품부터 최근 몇 년 전까지의 작품을 읽지 않았거나 눈물 나는 삶의 아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함부로 평가를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말꼬투릴 잡는 것은 아니고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쓴 글을 기억하는 작가는 거의 없겠지만 ‘이외수’의 작품 ‘들개’ ‘작가의 말’을 함께 소개 한다. – 그 시절 ‘이외수’의 작가 정신을 음미하기 바란다. ( http://memolog.blog.naver.com/uaok/22http://memolog.blog.naver.com/uaok/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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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목어' 블러그 "사람과 희망"   http://blog.naver.com/ua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