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반가 유한규](http://static.naver.com/ncc/2009/10/19/134404338311884.jpg)
한 번 노린 것은 놓치지 않는 독수리 같은 등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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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때인 72년 전국 체전 하이다이빙 종목에서 준우승한 것, 73년 해군참모총장배 수영대회에서 개인 혼영 3위를 한 것 등, 고교시절 경력까지 합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등반이다. 83년 유한규가 친구 임덕용과 더불어 세계 초등을 이룩한 바인타브락 2봉(6990m)은 그때까지 영국등반대가 6번, 일본대가 2번 실패했던 난봉이다. 그는 ‘악마의 이빨’이라는 그 봉을 초등정했다. 유럽의 3대 북벽 중 하나인 마터호른 북벽도 한국인 최초로 단독 등정했다. 2000년에는 45세라는 적잖은 나이로 마(魔)의 산 케이투(K2.8611m)를 등정해 동년배들을 감탄케 했다.
그는 산악인들 가운데 남달리 일찍 스키를 시작했던 사람으로, 끝내는 ‘스키 강사들을 가르치는 강사’의 실력을 갖추었다. 40대 때 그는 코오롱스키학교 교장으로, 겨우내 베어스타운이나 용평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좀더 완벽한 기술을 갖추고자 홀로 가파른 슬로프 모서리로 터닝 연습을 하며 내려가던 그의 모습을 본 것이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 외, 어떤 분야에서도 그는 꾸준한 절차탁마를 잊지 않았다. 오전 내내 스키 타고, 오후엔 산악자전거 타러 나서곤 하던 그에게 질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던 기억이 역력하다. 골프도 그는 싱글이며, 헬멧을 쓰고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20대의 젊은이다. 맹금류 특유의 기질마저도 그와 그의 주변 지기들에게서는 엿보인다. 한 번 노린 것은 좀체 놓치지 않는다거나, 눈에 차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거나, 맞대응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대상과도 한판승을 벌여 이겨내곤 하는-.
유한규를 살리고자 목숨을 버린 선배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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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호른 북벽과 바인타브락2봉 등정이 대표적인 예다. 등정을 이루기 이태 전인 81년, 실은 그는 그 봉 등정에 실패했고, 하산 중엔 선배 이정대씨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엔간하면 포기하련만 그는 2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결국 등정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81년 7월15일 오전 6시, 유한규는 이정대 선배와 한 조로 제3캠프를 떠나 등정길에 나섰다. 악마의 이빨이란 별명답게 이 암봉은 날카롭고 가팔랐으며, 암질 탓에 확보용 하켄은 제대로 박히지 않았다. 때문에 유한규는 언제나 두 사람을 연결한 로프가 통과된 확보물이 최소 2개는 될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등반을 리드해 나아갔다. 두 사람 간의 간격이 항상 이렇듯 떨어져 있었기에, 뒤따르던 이정대 선배의 동작이 뭔가 이상하다는 기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 선배가 이미 거의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심하게 탈진한 이후였다. 그는 후퇴를 결정했다. 그의 확보를 받으며 가파른 빙설벽을 위태스레 내려가던 이정대 선배의 한쪽 발에서부터 무언가 떨어져 나와 ‘피잉-’ 하고 절벽 아래로 사라져갔다. 아아…, 아이젠이었다. 미끄러운 빙설벽에선 곧 목숨 같은-. 그는 한쪽 아이젠을 잃어버린 이정대 선배를 위해 피켈로 일일이 발 디딤을 깎으며 고난의 하산을 이어갔다. 어두워지며 기온이 떨어지자 잠시만 쉬어도 한기가 스몄다. 옷은 땀에 젖었고 입은 것 이외 별다른 보온 의류도 없어 비박도 불가능했다. 그는 오로지 내려가는 일에만 몰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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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행으로 200m 벽을 거의 다 내려와 제3캠프를 향해 가로지르기를 해 나아갈 때였다. 이제 확보용 하켄은 모두 써버리고 없어, 그는 눈사면에 피켈을 깊이 박고 거기에 로프를 건 다음 천천히 당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로프 저쪽의 느낌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한 순간 로프의 끝이 손에 잡혔다. “정대 형은 자신이 추락하면 두 사람이 같이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만약의 경우 후배라도 살리자고 자기 안전벨트에서 로프를 풀어버렸던 것 같아요. 후배의 등정길을 방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탈진할 때까지도 아무 말 않고 뒤따라 올랐듯이-. 정대 형의 성정이 그랬어요.” 끝내 본능에 매달리지 않고 후배인 그를 살려내고자 자신의 목숨을 버린 정대 형에 대한 마음 빚은 컸다. 그는 그 빚을 갚기 위해 독하게 심신을 다시 다진 뒤 83년 바이타브락2봉에 재도전, 기어이 등정을 이루어냈다.
무아지경의 휴식을 위해 단독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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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을 한 그를 보면 종종 제복을 갖추어 입은 군인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체험을 반복하며 극도로 절제하는 것이 습관이 된 그의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자를 갖추어 쓰고 칼만 빼 들면 영락없이 대열 앞에 서서 진군하는 저 남북전쟁 영화 속의 기마부대장이지,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할만한 일이라 생각되면 끝까지 밀어붙여 성사시키는 그의 기질은 산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가 한국 최초의 본격 사설등반교육기관인 코오롱등산학교 창설을 주도한 일은 한국 산악사에서 두고두고 기리게 될 업적일 것이다. 그 외 그는 국내최초의 스키 전문교육과정인 코오롱스키학교 개설도 주도했고, 2002년 겨울엔 대한산악연맹 스키등반 위원장으로서 한국 최초의 정식 산악스키대회를 시작, 정착시켰다. 이 모두는, 독수리의 영역 확보가 그러하듯, 그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외연의 확장이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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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투지와 의지의 사나이지만, 알고 보면 그의 가슴은 얼마나 여린가. 85년 마터호른 단독 등정 때, 실은 그는 로프를 한 가닥 밑으로 늘어뜨린 채로 올랐다. 마치 누군가 동료가 밑에서 그를 바라보며, 만약의 경우 그의 추락을 멈추어주기 위해 로프를 풀어주고 있기라도 한 듯-. 그는 바위에 박힌 하켄이 보이면 거기에 로프를 통과시키는 시늉도 하며 등반을 이어갔다. 그의 나이 서른이던 그 때, 그 깎아지른 거대 북벽에서의 오름짓은 그렇도록 두렵고 외로웠던 것일까. “글쎄요, 두려움? 벽 바로 밑에 다가설 때까지는 두려웠지만 막상 등반을 시작하고 나니까 싹 사라졌어요. 외로움? 그렇죠. 등반 시작 후 한동안은 외로웠지요. 하지만 나중엔 그 외롭다는 감정도 사라졌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도, 아무 감정도 없이 오로지 오르는 행위에만 깊이 집중할 수 있었어요.” 거대한 벽의 단독등반에서 단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 그런 ‘미친 짓’을 한 이유는 대체 뭐냐고 묻고 싶어질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깊이 몰두해 오르던 그 시간대는 뭐랄까, 깊고 깊은 휴식의 시간대였다고 할 수 있어요. 몸은 물론 숨 차고 힘들었지만 말이죠. 그 맛 때문에 반복해 등반하러 나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간혹 제가 무척 경쟁적인 등반을 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아니에요. 무아지경의 휴식대에 들기 위해 내 자신과 독하게 경쟁한다면 하는 것일 뿐이지, 타인과의 경쟁은 아니었어요.” | |
그러나 과거 젊은 시절의 그에게 산은 오로지 경쟁의 무대였다고 그는 고백한다. 악우회 이야기다. 경기대 산악부 출신인 큰형의 로프를 몰래 꺼내 들고가 친구들과 북한산 인수봉을 오르던 고교 3년생 유한규는 악우회 창립 멤버인 이종건씨 눈에 띄었다. 이미 악우회엔 윤대표, 허욱, 한윤근 등 당시 쟁쟁한 클라이머로 이름 날리던 선배가 여럿이었다. 악우회는 한국 첨단 등반모임을 자처하며 볼트를 잡지 않고 오로지 바위만을 이용해 오르는 클린 클라이밍도 주창하던 첨단 등반모임이었다. 일부러 배낭을 묵직하게 메고 둔중한 빙설용 등산화를 신고 하루에 인수봉 암벽루트를 세 개씩 오르거나 벽 중간에 매달려 자기도 하는 등, 남달리 열정적인 등반 열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 악우회에서는 자연스레 경쟁적 분위기가 싹텄다. 누군가 어느 루트의 어떤 고빗사위를 자유등반으로 꺾어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젊은 회원들은 너도나도 그 한계를 넘고자 애썼다. ‘먼저, 빨리, 잘’ 이 세 어휘로 당시 악우회의 분위기를 요약할 수 있다고 유한규는 말한다. 그때까지의 자신을 그는 ‘고래 춤의 시기’로 정의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 있죠? 그렇게 그때까지는 선배, 동료들의 칭찬에 고무되어, 자만심으로 가득 차 올랐던 시기였다는 뜻입니다. 칭찬을 받는 대상이었던 당시 20대 회원들은 경쟁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동료와 함께 하는 등반의 가치를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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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분위기 속에서 클라이머로 성장한 그의 자만심은 유럽 알프스 그랑드조라스와 마터호른 북벽 등정으로 훈장을 받았을 때 극에 다다랐다. 그러나 81년 바인타브락2봉 사고를 겪고, 자신만의 창조적 등반을 하다가 사라진 일본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의 저서를 접하며 그의 등반관은 성취가 아니라 등반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00년 케이투 등반에서 그는 후배에게 결정적 감화를 받는다. 2000년 케이투 등반은 엄홍길의 14좌 완등 행보에서 마지막 마무리 등반이었다. 제4캠프에서 자고 나서 엄홍길, 한왕용 등과 그까지 6명 대원은 산소통을 하나씩 나누어 마시며 등정길에 나섰다. 그런데 유독 그의 레귤레이터만이 고장이었다. 산소를 쓰며 걷는 다른 대원들은 해발 8,200m 지점인 보틀넥에서 이미 가마득히 멀어졌고, 그는 혼자 보틀넥 밑에서 지쳐 멈추었다. “그 때 랜턴 불빛 한 점이 되내려오는 거예요. 한왕용이었어요. 내가 안 올라오니까 걱정이 돼서 내려온 거죠. 그 친구가 산소 레귤레이터를 입에 대주는 순간, 뭐랄까, 정말 마약 마시는 순간이 그럴까요. 가슴부터 온 전신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왕용이는 그렇게 나한테 레귤레이터 주더니 자기는 그냥 올라가겠다는 겁니다. 그 친구도 14좌 완등이 목표였는데 말이죠. 왕용이는 비록 후배지만 같이 올라가는 등정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죠. 후배한테 존경심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진정한 동료애, 진정한 리더십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그는 그때 확연하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 후 2003년부터 그가 OBK(Outward Bound Korea)를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1915년 영국의 새클턴 일화 아십니까. 남극 탐험에 나섰다가 배가 부빙에 갇혀 조난당했을 때 새클턴은 선장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자기가 애지중지하던 금장 파이프부터 바닷속에 던져버리면서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 챙기자고 호소했죠. 그런 식으로 선원들 36명을 이끌면서 1년 반 동안 남극에서 생존 투쟁을 한 끝에 결국 전원이 살아 귀국합니다. 감동적 동료애, 진정한 리더십의 표본이죠. 제가 등반을 통해 궁극적으로 느낀 것도 그것이고-. 그것을, 제가 감동과 더불어 체득한 것을 사회에 전파하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고자 한 것이죠.” 그가 진심으로 느낀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업이니만큼, 아직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대세인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한 개념인데도 그런대로 잘 되고 있다고 한다. 대한산악연맹 청소년오지탐사대 일에 그가 적극적인 것도 물론 이런 가치관에 바탕을 둔 것이겠다. 유한규, 그는 과거 젊은 시절에 비해 정말 많이 달라진 것 같다. | |
출처 : We ♥ Ski Mountaineering(산악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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