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를 통하여 이르는 자유

2007. 5. 31. 13:01[사람과 향기]/▒ 문학의향기 ▒

      나를 통하여 이르는 자유
     -.의식의 성장을 이루라는 말은 생각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추라는 얘기가 아니라 
    실존적인 의식의 성장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계속 자각을 해서 통찰의 안목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이것이 실존적이며 진정한 성장입니다. 생각의 파편을 잡는 것이 깨달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장난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성숙한 자는 생각을 하지 않는 자가 아닌 생각을 다루는 자입니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자는 생각을 결코 남용하지 않으며 정체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는 생각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으며 능히 생각을 자신의 뜻대로 다룰 줄 아는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일으킨 생각을 보고 지혜로운 자는 생각을 일으킨 나를 봅니다.
     -.모든 것은 나를 통해서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나 이외의 신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의 것을 버릴 것을 확실히 찾은 다음에, 앞에 두고 노려본 다음 발로 차라.-구제프-
     -.현명한 자는 내 멋에 사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입니다. 내 멋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나의 풍요로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풍요로운 마음이 나의 진정한 멋입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멋쟁이는 비교할 수도 비교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생각을 존재케 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자각한 사람입니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의식 
    상태가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생각을 일으켜서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나'의 중요성만을 강조할 뿐 생각을 만들어내는 '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참된 명상이란 이렇게 생각을 보는 것이 아닌 생각을 하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누리고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겪고 있습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의 만족을 즐기고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평을 
    겪고 있습니다.
     -.마음 공부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자기가 자유를 찾는 것입니다. 
    바로 나로부터 자유를 찾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 공부라는 것에 대해 계속 '이것은 
    너무 단순하지 않느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저렇게 이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깨달음은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깨달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만들어 내느라 말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거의 그런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설정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런 설정들이 자기를 자유롭게 
    해주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하고, 저런 상태가 되어야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기 구속일 뿐입니다.  
    마음공부는 이러해야 한다고 마음 공부가 그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공부는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그것도 자신의 한 생각일 뿐입니다. 여기서 '마음공부는 이런 것이다.
    ' 혹은 '마음공부는 이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얘기하는 
    내가, 그 생각의 주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상태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깨달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반박하며 논쟁을 합니다.' 그런게 아니다'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생각 
    하나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생각을 일으킨 자신을 배제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7년 고행을 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고행의 환상을 깨달은 것입니다. 
    7년동안 앉아서 '내가 만들어 내 생각 안에 나를 구속했구나.' 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마음 공부는 나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스트레스 받게 한다면 그것은 공부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 당시 마음
    공부의 환상에 대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뭔가 이것이 아닌 것 같고,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려워야 하고 독특해야 하고 별나야 한다는 교육을 우리가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공부라는 것은 
    좀 더 높은 경지를 보는 것도 아니고 
    좀 더 나은 능력을 보는 것도 아니고 
    좀 더 깊은 진리를 보는 것도 아니고 
    좀 더 자유로운 상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만들고 있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마음공부의 왕도는 마음공부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문제의 주인이 
    되세요. 문제를 만들어 내는 그 나를 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나를 보는 것이 마음공부의 
    주인이 되는 길입니다. 문제의 노예가 되면 끊임없이 문제가 다가옵니다.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주인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세요. 
     -.사실 산에 가서 수행하는 것은 쉽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신선처럼 지내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일상에서 다른 개성과 부딪히면서 어울리는 것이 제대로 된 수행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자기를 성찰시키고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모든 경험을 마음공부의 
    소재로 만들어 보세요. 열등감, 답답함, 혼란함,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성장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소재입니다. 
     -.진정한 '나'는 '나'를 만들고 있는 '나'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태어난 핏줄과 자라난 자리에서 찾을 수 있고, 뻐기지도 아첨하지도 
    않는다. 함께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때로 아픔이 된다.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 한다. 
     -.예술이란 하루 아침의 얄팍한 착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재치가 예술일 수는 
    더욱이 없는 일이다. 참으로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한눈팔 수 없는 외로운 길을 심신을 불사르듯 살아가는 그 자세야말로 정말 귀한 예술의 
    터전일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세상을 살아가는 맛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보면 자연과 조형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또 그것을 느끼는 즐거움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다움이라 해도 그 갈피가 많아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자연과 조형의 아름다움을 자기의 안목이 어느 만치 가늠할 수 있고 또 이것을 어느 만치 
    간절하게 느낄 수 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즐거움이 크게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이건 조형의 아름다움이건 남보다 더 알아볼 수 있고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눈일수록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아름다움을 남보다 풍성하게 
    즐기는 쪽으로 셈해 보면 행복한 사람일 수 있지만, 남의 눈에는 안 보이는 추한 것들을 
    느껴야만 되는 괴로움이 불행감을 안겨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아름다움을 많이 느끼지는 못하는 대신 추한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인지, 
    추한 것에서 받는 괴로움을 남달리 더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행복한 것인지는 각자가 
    지닌 교양과 천성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에서 엇갈리기 쉽다. 
    정말 좋은 그림을 보게 되면 그만 죽어 버리고 싶다고 상기하는 젊은 여류가 있는가 하면, 
    절세의 명작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법열경(法悅境)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원참,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지 몰라. 뭘 보고 저러는지? 하고 빈정대는 중진 예술인도 있다. 
    참아름다움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진리의 갈피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결코 큰 덩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뜰 앞 잔가지에 구슬진 영롱한 이슬, 
    오솔길에 차분히 비에 젖은 낙엽, 서리찬 겨울 달밤 빈 숲 잔가지에 쏟아지는 달빛, 예를 
    들자면 끝이 없지만 고맙고 즐거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갈피갈피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낙이 젊음과 사랑의 생리 속에 속속들이 스몄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쨌든 세상에는 사랑의 즐거움을 으뜸으로 치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 사랑이란 충분히 
    즐겁고 아름다운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세상 살아가는 먼 길에서 사랑은 때로 방황하고, 
    때로는 지겨우며,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허무해질 때가 있다.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 
    한다. 반려 없이 보는 아름다움은 때로는 아픔이며, 때로는 외로움과 호젓함이며, 때로는 
    그 의미를 잃는다. 사랑을 잃은 사람의 눈에 세상이 빛을 잃어 보이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공감하는 사람끼리 그처럼 아름답게 바라보던 자연과 조형 작품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허망해 보인다는 것은 아름다움이 그처럼 외로움을 잘 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더불어 
    함께 차 한 잔을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상대, 그것은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랑이란 항상 짙은 핑크빛 장미 속에서만 도사려 있는 것은 아님을 뜻한다. 
    즉 같이 즐기는 차 한 잔의 예사로운 시간과 공간의 참공감이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일 
    경우, 그것은 사랑보다 더 아늑한 행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 
    
출처 : 자연과 삶의 향기
글쓴이 : 피츠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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