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식물은 죽어서나 부패하지만 인간은 살아서도 부패한다.

2010. 3. 11. 17:22[사람과 향기]/▒ 삶 의 향 기 ▒

나도 삼성의 장학생(?)이었다. 
동물과 식물은 죽어서나 부패하지만 인간은 살아서도 부패한다.  
 
 
해외에 사는 이유로 아직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에 관해서 썼다는 책을 아직 읽지 못했다.
몇 해전 한겨레에 삼성 광고가 끊끼기 전에 홍세화 씨에게 들은 이야기로 한겨레 신문조차 1년 예산의 18%가 삼성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이라고 했다. 국민의 영혼을 부패시키는 삼성에 비하면 ‘지독한 자식사랑’의 대표 선수였던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차라리 귀여운 애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갑자기 구중궁궐 깊고 깊은 곳에서 국가를 요리하는 이건희 회장에 비해서 동네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주먹을 쥔 김승연 회장은 귀엽게 생각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라(이 싸움은 다윗이 이겼으니까) 공룡에 덤벼든 모기처럼 무모한(?) 싸움을 벌인 김 변호사의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기를 기대한다.

 

나도 한창 잘 나갈 때(?)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삼성에서 갖다 바치는 뇌물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서 맛있게 받아 드신 적이 있었다.
아마 1990년 도쯤이었을 것인데 하루는 집에 와보니 지금은 외국에 팔아버린 부천에 공장이 있는 삼성반도체 인사팀장 명함이 붙어서 추석 선물용 비싼 갈비세트가 배달이 되어 온 일이 있었다. '다른 집으로 갈 것이 잘못 왔는가 보다. 곧 찾으러 오겠지'라고 생각하며 며칠간 그냥 내버려 두었었다. 보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혹시 정말로 나에게 보냈다면 그것도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고 더 이상 두면 고기가 부패할 것 같아, '일단 먹고서 내가 부패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맛있게 먹어 버렸다.


궁금증을 못 이겨서 나중에 다른 경로를 통해서 그 선물이 정말 나에게 온 것인지를 확인을 해보았다. 정답은, 우선, "삼성이 어떤 곳인데 그런 실수를 하겠느냐?" 하는 것이고, 선물도 등급이 있는데 "그 정도면 그 쪽에서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이니 아무 소리 말고 잘 드시라."고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나 같은 사람도 지역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관리차원으로 갈비 세트를 정례적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 후, 우리 집사람은 명절 때마다 십 여 년을 꾸준히 ('세상에, 어느 효자가 그렇게 정성이 지극할까?'싶을 정도로) 보내오는 갈비 세트로 식탁을 꾸려왔다. 나중에는 명절이 되면 은근히 기다려졌다. 삼성이 그렇게 관리하는 인물이 전국적으로 20만 명이라는데 영광스럽게도(?) 나도 그 20만 명 중에 한 명으로 지명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했는데, 내가 모른 체 하고 넘어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갈비 세트로 한 번 맺은 인연을 그대로 썩힐 수가 없어, '어떻게 하면 삼성반도체와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는 없을까?'하고 궁리하던 차에, 드디어 건수가 생겼다. 당시로는 내가 책임을 맡고 있던 단체는 모두가 비합법(불법이 아니고) 단체여서, 삼성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아는 환경운동 단체에서 행사를 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삼성 반도체에 지원을 부탁했더니 1,500만원을 지원해 주었다. 말 한 마디에 우리 집 전세 값인 1,500 만 원이 생긴 것이다. "참 좋은 세상도 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았다.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는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 고스톱 판에서는 "오고 가는 현금 속에 싹트는 우정"이라는 금언이 있지만, 오고 가는 선물 속에 이런 훈훈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이런 훈훈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끼리만 부드럽게 돌아갈 때, 그 관계 속에 끼어들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썰렁한 찬바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주고받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오고가는 것이 없을 때 얼마나 허전할까?

 

호주나 미국으로 자녀를 유학 보낸 학부모들이 자녀 방문을 했다가 교사들에게 촌지를 드리는 한국적 미풍양속(?)을 보여 주어서 교사들을 놀라게 한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다. 촌지의 맛에 입맛을 버린 어떤 사립학교 교장은 호텔에서 한국 학부모들과 자녀 교육에 대하여 상담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으로 단골출장을 가는 일도 있었다.

 

김 변호사의 폭로 내용 가운데 삼성이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차명계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역시 부천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의료보험이 필요해서 부동산을 대규모로 취급하는 고교 동창의 회사에 주민등록등본을 갖다 주고 국민연금은 내가 내기로 하고 직장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았었다. 호주로 오기 위해서 몇 푼 안 되지만 그동안 낸 국민연금을 돌려받으려고 했더니 신용조사가 나오는데 모 신용기금에 내 이름으로 3 억 원이 예치되어 있단다.

 

"아!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축복을 해주시는구나. “하고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신용금고에 가서 창구 여직원에게 ”내 통장에 3억이 있다는데? “ 하고 어정쩡하게 돈을 찾을 의사를 밝혔더니 눈도 깜짝 안하고 오후에 오시면 ”협조해 드리겠다. “라고 했다. 돈을 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협조해 주겠다.’는 아리송한 대답을 듣고 돌아왔더니 동창이 전화를 해서 ‘그 돈에 신경 안써도 된다.’고 했다. 이런 것이 바로 차명계좌였다. 삼성이 이런 것이 없다고 해명을 했는데 에이! 거짓말도 정도가 있게 해야지 재미가 있지!

 

호주와 한국의 정치를 한 마디로 비교하자면 호주는 숫자의 정치라면 한국은 이미지 정치인 것 같다. 호주 정치인의 공약은 두루뭉술한 공약이 아니라 모두 숫자이다. 예를 들면, 유아 교육에 얼마, 노인 복지 수당에 얼마, 세금은 얼마나 깎아 주겠다는 식으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다. 호주에서는 정치인이 발언을 하다가 숫자 하나가 틀리면 큰 문제가 될 정도로 구체적이지만, 한국은 ‘누가 하면 잘 할 것 같다’ 혹은 ‘누가 하면 못 할 것 같다’는 식의 추상화 수준이다.
그것도 동향화가 아니라 서양화.

 

그래서 '뭐든 손만 대면 성공할 것 같은 이미지'의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통채로 말아 잡수고 계시지 않는가? 이러다가 하나님께 봉헌하고 싶어도 할 것이 없게 되어버리지 않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다.
 
가끔 호주신문에 정치인이 몇 천 만원을 잘못 썼다고-사적인 여행에 세금을 썼다는 둥-개망신을 당하는 기사를 보면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정치인이 해먹었다하면 최소한 몇 억대 정도는 되어야 하고 대통령쯤 되면 수천 억 대인데, 쩨쩨하게 몇 천 만원 가지고 시끄럽다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친한 흑인은-호주의 흑인은 미국의 흑인과 달리 아프리카에서 직수입된 흑인들이다-돈 있으면 아프리카로 가자고 농담을 건다. 왜냐하면 독제세력과 손만 잡으면 세금을 전혀 안내고 특혜를 받으면서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게 해 줄 수 있단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이다.

 

박 정희가 국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었다고 좋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박 정희의 경제개발은 한 마디로 외국 돈을 끌어들어다가 재벌들에게 맡겨서 이룩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돈에서 10%를 수수료로 떼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만들든지 원가가 10% 더 든 셈이다. 그러다보니, 하는 것마다 부실과 부패가 끼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국민은 100원 짜리 물건을 110원에 사서 써야 했으니, 박 씨가 떼어 먹은 돈을 국민의 피땀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좋은 예로, 삥땅을 안 뜯기고 빌려온 돈을 그대로 투자한 곳이 딱 한군데 있는데 바로 포항제철이다. 정치자금 수금사원을 맡았던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인 김성곤 씨가 포철 차관에도 손을 데려하자, 같은 군 출신인 박태준 씨가 박정희를 찾아가서 “각하! 포철은 국가적 중대 사업이니 이것만은 손대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했더니, 박 정희 씨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던지 고개를 끄떡였단다. 포철이 오늘날 모범적으로 성장한 것이 그냥 잘 된 것이 아니다. 분명히 나머지도 손 안 대고 순수 시장원리에 맡겼으면 한국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을 거두어다 모두 어디다 쓴 거냐? 그것이 바로 통치자금이다. 김대중 씨가 2000년에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 시키려고 김정일에게 통치자금을 조금 대주었다가 개망신을 당했다. 김정일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니 돈이 드는 것이다. 박 씨가 부정선거에, 3 선 개헌에, 10월 유신에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니 막대한 정치자금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정치가 얼마나 금권에 오염되어 왔었는지 정치 현장을 잘 모르는 분들은 감이 잘 안 잡히실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 잠시 여당 국회의원 비서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이란, 국회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비서 중에 제일 막내로서 지역구 사무실로 출근을 해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조직 관리, 의원의 각종 연설문, 기고문 등을 작성하는 일, 집회에서 사회를 보는 일 등등 닥치는 대로 허드레 일을 하는 것이었다. 자, 그럼, 나의 지극히 작은 경험에 근거해서 통치자금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한 번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1971년 박 씨와 김대중 씨가 붙었을 때였다. 대선에서 총체적 부정선거로 김 씨를 이기고 총선을 치르는데 당시 우리 의원의 선거구는 대부분의 시골이 그렇듯이 야당이 전혀 힘을 못 쓰는 쉬운 선거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 전 날 의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그 날 참모회의에는 지구당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의원의 동생들까지 참석을 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했는데 사무실에는 큰 여행용 가방 두 개가 있었다. 가방을 여니 영화에서 마치 갱단들이 마약자금을 교환할 때 보여주듯이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했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본,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 돈이었다.


소위 그런 돈을 정치판에서는 "오리알"이라고 한다. 한번 계산 좀 해 보시라? 3000 만 인구에 가구 수를 7백 만만 잡고 만 원씩이면 도대체 얼마냐? 만 원이 요즘 만 원이 아니고 당시 대학 등록금이 10 만 원일 때의 만 원이었다. 물론 전라도는 안 주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려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고 그 돈을 마련하려니 차관을 들여올 때 마다 삥땅을 뜯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던 것이다. 의원은 절대로 말썽이 안 생기도록 신중을 기해서 밤중에 조심해서 집집마다 찾아가서 세대주를 만나서 직접 전달하도록 작전 지시를 했다. 도둑놈이 돈을 훔치러 밤 중에 몰래 남의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돈을 주는데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다니라니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을까? 이런 것이 바로 후진국형 정치 코미디인 것이다.

 

공산화된 월남을 다녀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부정부패가 매우 심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월남이 어떤 나라인가?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을 위해서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귀중한 희생을 치루면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쳐서 자랑스럽게 통일을 이룬 월남이 아닌가? 그런 나라가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부패가 심한 나라가 될 밖에야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단 말인가?

 

결론은, 프랑스도 이기고 미국도 이겼지만 머니는 못 이긴다는 것이다. 아니다. 머니를 못 이겨서가 아니라, 독재는 부패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부정한 돈이 오고가는 것이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힘이 한 곳으로만 집중되어 자정 능력이 없는 제도는 썩게 마련이다. 부패는 독재의 상징이다. 한국도 한 때 꽤나 부패해서 관공서를 상대할 때는 급행료를 지불해야 일이 제대로 될 때가 있었다.(물론 일부는 아직도 유효하다^^)

 

기계는 기름칠을 잘해야 잘 돌아간다. 그런데, 이 원칙이 세상살이에 적용될 때는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즉, 뇌물을 써야 잘 돌아간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처음 뇌물을 주어본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고등학생이 뇌물을 주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남자가 만 18세가 되면 ‘제1 국민역 신고’라는 것을 해야 했다. 사실은 안 해도 되고 대부분은 하지 않고 지나가는데 집안 사정이 복잡해서 나는 내 문제를 돌보아줄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해서 내 스스로 신고를 하러 다녔다. 그런데 전혀 복잡할 것 없는 사소한 신고에 불과한 일인데도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구청과 동회에 가보니 공무원이 자세히 알려 주지도 않고 무조건 ‘틀렸으니 다시 써와라’고 퇴자를 놓았다. 직원에게 퇴자를 맞고서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서 구청 앞에 있는 대서방에 가서 물어보니까 “담배나 한 두 갑 사다 줘”하는 것이 아닌가? 담배도 피지 않는 고등학생에게 담배를 사다주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키는 대로 담배를 두 갑 사서 공무원의 책상에 놓고 “수고하시는데 담배나 피워 가면서 하세요.” 하면서 신고서를 내 놓았더니, 두 말없이 도장을 찍어 주려고 했다. 뒤에 있는 상관의 책상에 있는 도장을 집으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책상 위에 있는 담배를 날래게 집어서 얼른 내 남루한 학생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공무원이 오른 손으로 내가 내민 신고서에 도장을 찍고서 왼손으로 더듬어 담배를 찾는데, 어쩐지 허전한지 ‘얼라? 담배가 어디 갔지?’ 하는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고맙습니다."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동회의 문을 나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공무원은 설마 내가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으리라는 꿈에도 상상은 못할 것이고 아마 하루 종일 ’이상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그 담배가 어디 갔지?‘ 하고 담배를 찾았을 거다. 담배는 오는 길에 대서방 영감님께 드렸었다.

 

그 사건 이후에는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줄 일은 없었고 오히려 뇌물을 받을 일은 여러 번이나 있었다. 1989년 언론이 자유화 되어 한겨레신문처럼 부천시민들이 돈을 모아 만든 부천시민신문을 발간 할 때였다. 당시 나는 신문의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부천시청에서 세금문제를 실수한 일이 있어서 보도를 하려하자 보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안 된다고 하니까 시청 직원 가운데 교회 장로이면서 나를 잘 아는 분을 밤에 우리 집으로 보내서 돈을 가지고 왔다. 그분은 돈을 받고서 기사를 실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목사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는 건데 의례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며 점잖게 훈수까지 두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신문은 자존심과 긍지 하나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훈수가 먹힐 리가 없었다. 물론 얼마 못가서 돈이 없어서 문 닫고 말았지만.

 

내가 지금 시드니에서 봉사하고 있는 한인복지회라는 단체로 ICAC(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 독립부패조사위원회)
라는 정부기관에서 초청이 왔다. 우리 같은 소수 민족을 위해서 ICAC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신고를 많이 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호주는 사법, 입법, 행정, 민간 부분까지 부패에 관한 조사권한이 이 ICAC에 통합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간첩신고는 112처럼 수상하면 무조건 ICAC로 신고하면 되는 거다. 신고자의 비밀 보장과 신변 보호가 철저하단다. 한국도 ICAC 같은 기구가 있다면 김용철 변호사가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터인데...


우리는 징그러운 신문인 조중동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지만, 김용철 변호사 같은 한국판 에밀 졸라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동물과 식물은 죽어서나 부패하지만 인간은 살아서도 부패한다.

 

-글쓴이, 시드니 택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