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9. 17:27ㆍ[알피니즘]/▒ 알 피 니 즘 ▒
알피니즘
1. 알피니즘의 정의와 태동
알피니즘이라는 말은 스위스를 가운데 두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다섯 나라에 걸쳐 있는 유럽 알프스의 고산 지대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으며, 불어의[알피니즈메]에서 시작하여 영어[알피니즘], 독일어[알피니즈무스], 이탈리아어[알피니즈모] 등으로 불리며, 알피니즘은 오늘날 등산을 뜻하는 국제 공통어가 되었습니다.
또한 등산가를 '알피니스트' 등산학교를 '알파인 스쿨', 산악회를 '알파인 클럽', 등산용 지팡이를 '알펜 슈톡' 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 알피니즘에서 시작된 말이며, 히말라야 등산을 '히말라야이즘', 안데스 등산을 '안디니즘' 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피니즘은 등산의 역사적 기원 때문에 생겨난 말일뿐 알프스 등산이라는 좁은 뜻이 아니라 널리 일반적인 등산을 뜻한다.’ 고 프랑스의 등산가 뽈 베시에르가 그의 저서 <알피니즘>의 첫머리에 밝히고 있다.
등산(登山)은 알피니즘을 번역해서 만든 말인데 원래 서구인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에서 온 서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피니즘의 정의는 영국의 등산백과사전에 기술된 ‘눈과 얼음에 덮힌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행하는 등반’ 으로 요약해서 말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알피니즘의 역사적 기원은 1760년 스위스 제네바의 대학 교수인 베네딕트 드 소쉬르가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에 오르는 길을 아는 자에게 상금을 내걸면서 촉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의 사람들은 알프스 몽블랑에 악마가 살고 있고, 눈사태를 일으킨다며 무서워 했는데 몽블랑 정복은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뒤에 이루어 졌습니다. 그 당시 몽블랑 정복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와 그 곤란함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에는 알프스에 대한 숭고한 정신이 잘 나타나 있었으며, 이를 일컬어 알피니즘이라고 한 것입니다.
2. 머메리즘과 등로주의, 등정주의
등산은 몽블랑 초등 이후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가이드 등반에서 점차 가이드리스 등반으로 변천하였습니다. 그 무렵 그들의 산행 방식은 비교적 등반하기 수월한 산등성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산행이었는데 그러한 형식을 등정주의라고 합니다. 등정주의 산행 방식은 알프스 4천미터급의 마지막 보루였던 마터호른이 초등정 될때까지 지속 되었습니다.
등정주의의 시대가 지나면서 이제는 산허리나 가파른 절벽에 길을 내며 오르는 모험 등반이 시작 되었는데 이러한 길을 베리에이션 루트라 불렀습니다. 등반 난이도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보조 수단이 필요하게 되어 '인공 등반'이 등장하게 되는데, 당시의 보조 수단이라고 해야 극히 초보적이고 소박한 것으로 나무 쐐기와 줄 사다리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험로 개척을 주장하며 몸소 실천한 등산가가 바로 '머메리' 인데 그가 주창한 더 '험난한 루트' 의 산행 방식이 등정주의에 대한 등로주의로써 그의 이름을 따서 머메리즘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머메리즘은 알피니즘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 했으며, 오늘날의 등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암, 빙벽 등반의 행동 규범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머메리가 39세의 나이로 낭가파르밧 등반 중 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에는 "등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정상에 오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데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을 우리는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몽블랑 초등이후 수십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일부 등산가들은 히말라야 등반을 하면서 등정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도전과 모험의 한계를 어떤 등산가들의 수준에 비교하여 히말라야 등반을 등정주의라고 비난을 할 수 있는지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국내 유수의 설악산과 한라산 등지를 그냥 워킹 등산하는 사람들과 평생에 한 번이라도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히말라야 등반은 그야말로 꿈의 등반 대상지로써 많은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소위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하였거나. 그 것을 목표로 등반을 하고 있는 산악인들은 머메리즘의 정신을 본 받아 더 어렵고 험난한 루트를 통하여 히말라야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3.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와 철의 시대
몽블랑 등정 이후 알프스의 여러 고봉들이 많은 개척자들의 도전을 받아 하나, 둘씩 등정되기 시작합니다. 알프스 등산의 황금기는 1854년 난공불락으로 여겨 왔던 베터호른의 등정을 시작으로 1865년 4천미터 봉우리 가운데 최후의 난봉이던 마터호른의 등정으로 일단락 되는데, 이 기간에 무려 60개가 넘는 4천미터 높이의 고봉들이 모두 등정되었습니다. 세계 등산사에서는 이 12년 동안의 기간을 이른바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라고 합니다.
순수 등산을 뜻하는 '알피니즘' 이란 이름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절 이었으며,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에는 단연 영국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황금시대의 시작과 끝맺음의 주역이 모두 영국인이었습니다. 영국은 1857년 12월 22일 세계 최조의 산악회인 '알파인 클럽'을 창립하고, 1863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산악 연감인 '알파인 저널'을 창간하여 오늘날까지 발행하고 있습니다.
영국 산악회에 뒤이어 오스트리아 산악회와 스위스 산악회, 이태리 산악회, 독일 산악회, 프랑스 산악회 등 유럽 열강들이 하나 둘씩 산악회를 창립하게 되며, 19세기 알프스에서 수 많은 초등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이들 각국 산악회들이 경쟁적인 등반 활동을 벌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황금시대에는 등산 가이드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는데, 이런 시기에도 가이드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등반을 하는 루드빅 푸르첼러와 에밀 치그몬디, 오토 치그몬디 형제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가이드레스 등반을 실천한 산악인이자 단독 등반가 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게오르그 빈클러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단독 등반가였다고 합니다.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와 머메리즘으로 대표되는 알프스 은의 시대를 거쳐 알프스 철의 시대로 접어 들게 됩니다. 알프스 철(鐵)의 시대 특징은 머메리즘이 극대화하여 암벽에서의 직등과 인공등반이 행해졌으며 등반 기술과 장비의 발전으로 인해 등반이 한층 더 활기를 띠었으며, 또한 등산 활동의 무대가 알프스 본고장을 떠나 세계 도처의 미답봉으로 광역화 하게 됩니다.
이 시대에는 암벽 등반의 그레이드가 체계화되고 영국의 오스카 에켄슈타인이 개발한 10발 아이젠과 독일의 오토 헤르조그가 개발한 카라비너, 오스트리아의 한스 피히틀이 개발한 하켄, 프리츠 리겔레의 아이스피톤 등의 용구가 개발 되었습니다. 등반 기술로는 한스 듈퍼의 듈퍼지츠라는 압자일렌 기술과 에켄슈타인 아이젠 기술 등이 개발되어 미답의 북벽에 새로운 길을 열게 되고 또한 자유 등반을 넘어서는 인공 등반 기술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철의 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등반가로는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그레이드 체계인 '벨첸바하 스칼라'를 창시한 빌로 벨첸바하와 이태리의 리카로도 카신, 아이거 북벽을 초등한 프리츠 카스파레크, 하인리히 하러, 안드레 헤크마이어, 루드비크 베르그 등이 있습니다.
4. 극지법과 알파인 스타일, 슈퍼 알피니즘
극지법(Polar Method)은 원래 북극과 남극의 탐험에 사용했던 방법으로 1897년 이태리의 아브루찌공이 알래스카의 세인트 엘라이어스를 초등할 때 처음으로 고산 등반에 극지법이 사용된 이레 현재 대부분의 히말라야 고산등반에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지법은 베이스캠프를 두고 정상에 이르기까지 전진캠프(캠프1, 캠프2...)를 설치해 가며 식량과 장비를 수송해 가며 올라가는 방식인데, 대원들은 이과정을 통해 서서히 산소가 희박한 고소에서의 적응능력을 높여가는 장점도 있습니다. 극지법 등반방식은 많은 인원이 필요하고 기간도 여러달이상 소요되므로 많은 물자를 수송으로 인한 비용도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알파인 스타일은 극지법 등산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능력이 탁월한 등반가들이 극지법으로 올라가던 히말라야의 고봉을 마치 유럽 알프스지역에서 등반하는 것처럼 소규모의 등반대가 간단한 등반장비와 식량 등을 자신이 짊어지고 정상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알파인 스타일은 극지법에 비해 능력있는 등반가들의 발전된 스타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국제산악연맹이 정의한 알파인 스타일의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등반 대원은 6명 이내이어야 한다.
2. 등반용 로프는 팀 당 1~2동 이내 휴대해야 한다.
3. 고정 로프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등반대가 이미 설치한 루트 상의 고정 로프도 사용하지 않는다.
4. 사전 정찰 등반을 하지 않는다.
5. 고소 포터나 기타 지원조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6. 산소 기구를 휴대하거나 사용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세계 등반가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시도 하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1980년대를 맞은 세계 산악계는 극한 등반이 새로운 과제로 추가되고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히말라야의 6천미터이상의 산에서는 등반 사상 유래 없는 신기록들이 속출하면서 맹렬한 기세로 슈퍼 알피니즘을 추구하게 됩니다.
1986년 메스너는 드디어 8천미터 14개 고봉을 완등한 최초의 산악인이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 스위스의 에라르 로레탕, 멕시코의 카를로스 카르솔리오, 폴란드의 크리스토프 비엘리키, 스페인의 훠니토 오이아르자발, 이태리의 세르지오 마르티니, 한국의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오은선, 김재수 등이 이 대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20세기 후반에는 돈으로 등반 능력을 살 수 있는 상업 등반대까지 등장하게 되지만, 21세기의 등산은 어느 산의 지리적인 정복이나 탐험이 아니라, 대자연 속에서 인간 한계를 시험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앞으로 꾸준히 이어질 것입니다.
8,000m 급에서 종주, 연속 등반과 함께 14좌 완등자가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날이 갈수록 등반 장비가 첨단화되고, 많은 정보가 축척되면서 등반 양상이 빠르게 진전하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에는 돈으로 등반 능력을 살 수 있는 상업 등반대까지 등장하게 되지만, 21세기의 등산은 어느 산의 지리적인 탐험이나 정복을 떠나서, 대자연 속에서 인간 한계를 시험하고 그 능력을 개발하려는 노력과 함께 세계의 고봉과 대 암벽에서 인간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적으로 이루어질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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