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2007. 9. 8. 08:47[알피니즘]/▒ 알 피 니 즘 ▒

산악 등반은 국가들간 ‘정복전쟁’이었다
수많은 물량공세·수백명 희생으로 얼룩진 220여년 등반사
지구상 8000m 이상 14개 거봉에 얽힌 사람·사연·비경 담아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
이용대 지음/마운틴북스·3만원


“(산이) 거기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

불후의 명언이 된 이 말을 남긴 영국 산악인 조지 멀로리(1886~1924). 영국 에베레스트 제3차 원정대원이었던 그는 1924 년 6월7일 일기장에 “그 일을 하기에 완벽한 날”이라는 글을 남긴 뒤 동료 앤드루 어빈과 함께 8220m에 설치된 제6 캠프를 떠났다. 그들은 정상을 덮고 있는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과연 8850m(최근 측정치) 정상을 밟았을까? 이 유명한 실종사건과 관련해 갖가지 억측이 떠돌고 의문은 증폭돼 갔다.

1933년 제4차 영국 원정대가 북동 능선 8229m 지점에서 피켈 한 자루를 발견했다. 영국산악회 도서관 벽에 걸렸던 그 피 켈은 38년 뒤에야 어빈의 것으로 확인됐다. 1953년 에베레스트를 처음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와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는 멀로리와 어빈의 등정을 확인해줄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1960년 중국 등반가 스잔춘은 에베레스트 북동릉 8500m 지점에서 피켈 자루로 보이는 막대기와 로프를, 그 수백미터 아래에선 영국제 산소용구 2개를 발견했다. 1975년 중 국인 왕홍바오가 비슷한 북쪽 루트에서 2차 세계대전 이전 차림새의 영국인 주검을 목격했고, 옷에 손을 대자 바스라졌다 는 얘기를 그 4년 뒤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일본 산악인 하세가와에게 했다. 하세가와는 그 말을 들은 다음 날 눈사태로 숨 졌다. 1999년 누가 에베레스트를 처음 올랐는지 밝혀내려는 다국적 탐험대가 실종 75년만에 멀로리의 주검을 찾아냈다. 에베레스트를 두 번이나 무산소 등반한 현존 최고의 등산가 라인홀트 매스너(1944~ )는 멀로리와 어빈이 지금도 자유등반 이 불가능한 험준한 북동릉 8500m 지점에서 정상도전을 포기하고 하산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에베레스트는 원래 초모룽마(‘세계의 여신’)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1852년에야 이 산을 ‘발견’한 식민제국 영국이 측 량학자 이름을 억지로 갖다붙였다. 영국은 1921년부터 32년 간 9차례나 원정대를 보낸 끝에 ‘정복’의 야망을 달성했다. ‘발 견’으로부터는 100년이 지난 뒤였다.

치열했던 히말라야 고봉들 먼저 올라가기 경쟁은 실상 많은 희생자를 낸 또 하나의 민족국가들 간 ‘정복전쟁’이었다. 1934 년 7월6일 히말라야 제9 고봉 ‘벌거벗은 산’ 낭가 파르바트(8126m) 정상 200여m를 남겨 놓고 제8캠프를 차린 독일 2차 원 정대는 다음 날의 성공을 확신했으나 곧 불어닥친 눈폭풍에 10명을 잃고 실패한다. 그때 근대적 암벽등반 등급체계를 창시 한 알프스 북벽등반의 명인 빌로 벨첸바흐(1900~1934)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3년 뒤 독일은 세번째 원정대를 보냈으나 663 지점 제5캠프에 눈사태가 덮쳐 세르파 9명 등 16명 전원이 파묻혔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대의 비극이었다. 히틀러는 땅을 쳤을 것이다.

원래 초고리(‘큰 산’)라 불렸으나, 카라코룸 제2호라는 유럽식 측량기호가 붙여졌고 이것이 제2 고봉이라는 사실과 어울려 이름으로 굳어버린 K2(8611m), ‘다섯개 큰 눈의 보고’라는 캉첸중가(8586m), ‘남쪽 봉우리’ 로체(8516m), ‘큰 기상’ 마칼루 (8462m), ‘보석(터키석)의 여신’ 초오유(8201m), ‘하얀 산’ 다울라기리(8167m), ‘영혼의 산’ 마나슬루(8163m), ‘풍요의 여 신’ 안나푸르나(8091m), ‘아름다운 산’ 가셔브룸 1(8068m), 브로드 피크(8047m), 가셔브룸 2(803), ‘풀밭이 있는 산’ 시샤 팡마(8027m) 등 8000m 이상 14개 거봉들(주봉에 이어진 인접봉까지 합하면 29개)이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까지 가세한, 수백명이 동원된 대규모 물량공세 속에 차례로 ‘정복’당했다.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는 이 설산 등반의 역사, 얽힌 얘기들을 옛 자료, 비경 사진들과 함께 담았다. 히말라야뿐만 아니 라 알프스와 안데스, 록키, 아프리카 등 지구 전역의 거봉들과 거기에 도전한 사람들 얘기를 유장하고 재미나게 엮었다. 크 램폰, 피켈, 카라비너, 피톤 등 등산장비 및 기술 개발과 그 영향, 그에 따른 등산 조류와 철학의 변천도 살피는 종합적인 등산역사 입문서다. 이런 류의 국내저서로는 처음일 것이라고 20여년간 등산학교에서 강의해온 원로 산악인인 저자 이용 대씨는 밝혔다. <월간 마운틴>에 4년 간 연재한 것을 토대로 다시 정리했다.

산악 등반은 국가들간 ‘ 정복전쟁’이었다.
근대적 등산의 시작은 1786년 8월8일 의사 미셸 파카르와 수정 채취꾼 자크 발마가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에 오르면서부터 다. 이후 융프라우, 마터호른, 그랑드 조라스, 아이거 등 알프스 고봉들에 도전한 소쉬르, 윔퍼, 틴들, 스티븐(버지니아 울 프의 아버지), 그리벨 등 걸출한 인물들 얘기가 펼쳐진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행하는 등반”을 가 리키는 ‘알피니즘’이란 말은 알프스를 넘어 전세계로 퍼졌다. 알프스의 초기 등반 역사는 국력을 반영하듯 돈많은 영국 귀 족들이 휩쓸었다. 역시 ‘정복전쟁’ 성격이 짙었던 초기 알프스 등반의 역사는 “모든 세대를 통해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라 칭송받았던 ‘반역아’ 앨버트 머메리가 1881년 에귀유 드 그레퐁(3489m)을 “능선이 아닌 벽을 통해 오르면서” 획기적 전환 기를 맞는다. 높은 곳 먼저 오르기 경쟁에 골몰하는 ‘등정주의’가 아니라 더 험난한 루트를 고르는 ‘등로주의’가 비로소 등 장했다. ‘머메리즘’이라 했다. “등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정상에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 하는 데 있다.” 머메리는 39살 때 등반 역사상 처음 8000m급에 도전했던 낭가 파르바트에서 히말라야 등반 역사상 첫 희생 자가 된다.

히말라야 등반도 초기 ‘정복전쟁’이 휩쓴 뒤 1970년 영국 원정대의 안나푸르나 남벽 초등정 이후 ‘거벽시대’의 등로주의로 전환한다. 1975년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 2인조가 지원조의 도움 없이 고정 로프나 보조산소도 쓰지 않는 경량장비로 소수 대원이 중간캠프도 생략한 채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곧바로 속공 등반하는 ‘알파인 스타일’로 히말라야 8000m급 거봉들의 거대한 벽들을 차례로 올랐다. 메스너는 3년 뒤 20㎏ 배낭만 달랑 맨 채 낭가 파르바트로 가서 혼자 산소통도 없이 사흘만 에 완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등반역사를 다시 썼다. 무산소 단독등반, 동계 초등, 연속 등정, 거봉들 종주 등 ‘수퍼 알피 니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노턴, 쿠쿠치카, 쿠르티카, 딤베르거, 체센 등 영웅들이 줄을 이었고 린 힐, 데스티벨 등 여성들 도 지지 않았다. 2003년까지 11명이 히말라야 8000m급 14봉을 모두 올랐는데, 여기에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 한국 인이 3명(최다 보유국!)이나 들어 있다.



인간의 이기심, 어디까지 오르려나
등반 대중화·상업화로 고 산 훼손·오염 늘어


에버레스트의 힐러리 스 텝
얼마 전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다녀왔다는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히말라야가 등산객이 버린 쓰레기들로 심하게 오 염되고 있다며 “머메리즘이나 극한등반이나 세븐서밋이나 모두 정복주의의 변종일 뿐”이라고 개탄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오는 도로 주변이 온통 비닐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 광경과 더불어 착잡한 마음을 가 누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베이스캠프까지 올라오는 도중에 만난 많은 네팔인 짐꾼 들이 엄청난 무게의 생필품들을, 음료수와 술과 과자와 가스통을 비롯해 각종 상품들과 비닐로 포장된 쌀과 채소 등을 배 낭이나 포대에 담아 끈을 이마에 매는 독특한 네팔방식으로 날마다 나르고 있었습니다.” (<사람과 산> 9월호, <프레시안> 8월30일)

등산철학과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물량공세식 ‘정복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등로주의의 경량등반도 인적 물적 동원량을 대폭 줄긴 했지만 아주 없앨 순 없다. 등산의 대중화와 더불어 훼손과 오염은 늘어갈 수밖에 없다. 1990년대 후반 부터 첨단 등산장비들이 등장해 산의 세속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이젠 돈만 주면 누구든 어느 고봉이든 데려다 주는 상업 등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1996년 당시 상업원정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산객을 ‘모셔가는 데’ 1인당 6만5000달러였 다. 산의 높이나 난이도, 지명도에 따라 가격은 달라진다. 고객이 급증하고 상업등반대도 불어나면서 사고로 인한 인명피 해도 늘고 있다. 산악인 찰스 허스턴은 “이제 클라이밍은 순수 스포츠가 아니며 비즈니스가 됐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입만 이 관심사가 되고 있다. …위험이 클수록 수입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유명한 가이드 피터 애선즈는 “상업등반을 이용한 고 객들은 자기가 정상 정복의 티켓을 샀다고 생각한다”고 탄식했다.

암벽에 촘촘히 볼트를 박고 정상까지 고정 포프들을 깔아놓는 것도 문제다. 훼손을 피할 수 없다. 미국에선 요세미티 암벽 의 이런 장비들 설치문제를 둘러싸고 산악인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고 고정 설치물들을 제거하고 다니는 산악인들도 있다. 산악인들이 등반 과정에서 버린 자일, 산소통, 배낭, 가스통 등의 장비들도 등반객들이 폭증하면서 엄청나게 쌓여가고 있 다. 장비들을 거의 쓰지 않는 자유등반, 장비사용을 혐오하는 산악인들도 늘고 있지만 대세를 돌려놓긴 어려워 보인다.

산악 ‘정복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한국 등반계도 세계가 놀랄 정도의 ‘성과(!)’를 올리며 이에 가세하고 있다는 비판이 늘고 있다. 작전수준의 ‘정복’에 집착하는 등산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