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2007. 11. 16. 14:36[사람과 향기]/▒ 문학의향기 ▒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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