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니즘과 투어리즘의 새 지평을 열자

2008. 7. 7. 18:00[알피니즘]/▒ 산 악 칼 럼 ▒

||산악칼럼||

"산, 사람, 자연이 공종할 수 있는 깊은 성찰"
알피니즘과 투어리즘의 새 지평을 열자

글 김영도(한국등산연구소 소장)

 

 



허위와 외식을 모르며 조급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인간의 순진무구한 삶이 거기에 있었다.
진정 알피니스트와 투어리스트가 찾아야 할 이상경은 바로 이런 곳이다.


 

알피니즘(Alpinism)과 투어리즘(Tourism), 또는 알피니스트와 투어리스트. 이 두 개념이 서로 접근하며 장차 그렇게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더해간다. 이는 시대의 흐름과 그 흐름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가지 양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알피니즘은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어지면서 ‘미지의 세계에 도전’이란 본래의 목적과 목표를 잃었고, 투어리즘 역시 지난날의 꿈과 동경의 대상이 진부해지며 지식과 견문을 넓힌다는 관광 행차로 전락, 일말의 자극도 주지 않게 되었다.

알피니즘과 투어리즘이 직면하기 시작한 이러한 한계는 아직까지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개념이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그 본래의 존재 이유를 잃게 되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반세기 전만해도 없었던 일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가속화된 고도산업화의 충격은 인간 사회에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끝내는 알피니즘과 투어리즘 모두 그 설 땅을 잃게 만들었다.

더욱이 새 천년의 도래는 큰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길을 찾아 나서게 했다. 원래 알피니즘과 투어리즘의 동기는 일상성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모험을 매개로 문명사회를 탈출하는 것이며 후자는 새로운 풍물과 문화를 찾아, 무뎌진 의식과 감각에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던 외부 세계가 날로 빈약해지고 매력을 잃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알피니스트나 투어리스트 앞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지난날의 애착을 버리고 새로운 지평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렇다고 알피니스트나 투어리스트가 지금까지의 궤도를 변경, 수정하는 것이 본래의 정신과 동기를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옛날로 돌아가 선구자들이 갔던 길을 되밟으며 지금까지 잃고 있었던 소중한 세계를 재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1955년 마칼루 초등을 이룩한 프랑스원정대의 쟝 프랑코 대장은 등산을 ‘탈출’이라고 했다.이는 등산이 문명사회로부터의 탈출이며 일상성을 벗어남을 두고 한 말이다. 탈출은 알피니즘이 지닌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며 이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생활의식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투어리즘은 그 기원이나 발전 과정이 알피니즘처럼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투어리즘 역시 현대고도 산업화 과정의 산물이란 점에선 지향점이 일종의 탈출임에 틀림없다. 다만 양자의 탈출 발상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그 정신과 형식은 서로 달리하며 오늘에 이르렀다.알피니즘과 투어리즘은 모두 서구 문명사회의 소산이며 서구적 발상이다. 또한 그들의 생활 방식이다.

그들은 지도가 없던 시절 일찍이 바다로 나갔으며 산으로 올랐다. 역사상 대항해시대니 실크로드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행적을 가리킨다. 하지만 수백년 전의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통해 앞으로의 알피니즘과 투어리즘의 모습과 방향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초기 등산가, 탐험가들은 오지의 주민들을 앞세워 가며 깊은 산악지대를 파고들었다. 당시 그들은 황량한 계곡과 험준한 고개를 넘으며 며칠, 아니 몇 달을 산중에서 헤매고 다녔다.

20세기 초에 나온 흐레쉬휠프의 <캉첸중가 일주기>는 그 무렵의 대표적인 기록이다. 에베레스트 카라반 길도 새 투어리즘의 세계 현대의 누가 그런 탐사 여행을 하려들것이며, 누가 다질링에서 하늘 높이 떠있는 캉첸중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히말라야의 고봉에 오르는 사람은 많아도 그런 체험과 감정을 평가할 줄 모른다.

일찍이 히말라야 개척사에 이름을 남긴 에릭 쉽튼의 자서전적 저서가 있다. 즉, ‘가보지 않은 곳’, ‘미답의 세계’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자기가 가본 적이 없는 곳’ 이라는 협의의 소극적 뜻이 아니라 ‘지도의 공백지대’라는 광의의 적극적 의미가 담겨 있다.

쉽튼은 지구의 오지인 카라코람과 파타고니아 등지를 수차례 탐험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카라코람과 파타고니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으며 만사가 불확실했다. 특히 탐험 일수에 따른 식량과 장비의 수량 산출이 어려웠고 갈 방향과 기상 예측 문제가 변수로 따랐다. 쉽튼이 파타고니아에서 부닺힌 어려움은 현대 등산에서 말하는 극한상황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미지의 세계, 미답의 오지에서 겪는 진정한 어려움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기록에는 이런 선구자들을 일컬어 ‘익스플로러-마운티어(Explore Mountaineer)’라고 했으며 그들의 활동을 통틀어 ‘익스플로링 앤드 클라이밍 인 파타고니아(Exploring and Climbing in Patagonia)’ 등을 표현했다.

현대의 알피니즘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고 난 뒤, 탐험적 요소가 사라지고 투어리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히말라야는 가까워지고 달리 갈 곳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올랐건만 그곳을 찾는 감회를 이야기하는 것을 거의 듣지 못했다. 이는 에베레스트가 화제로서 진부해서가 아니라 체험을 못했으니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싶다.

아열대에서 한대로 수직 이동하는 에베레스트 카라반 루트는 다시없는 새로운 투어리즘의 세계다. 이 카라반은 현대 문명의 상징인 어떤 라이프 라인도 없는 산속 마을과 계곡, 숲을 지나가는 나날이 이어진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탐세르쿠(Thamserku·6623m)와 캉테가(Kangtega·6809m)의 준봉, 페리체에서 만나는 아마다블람(Ama Dablam·6856m)의 위용이 안겨주는 가슴의 설레임. 고락셉에서 느닷없이 부닺히는 푸모리 호수의 그 절망적인 정막감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히말라야는 그 이름난 고봉들의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며 그곳을 다녀오면 그만인 곳이 아니다. 오히려 이 광대한 고산지대 구석구석을 수놓은 골짜기와 풀, 표고 5,000m를 오르내리는 수많은 고개들, 그리고 킷심 카라코람 일대에 펼쳐지는 광활하고 황량한 대자연.... 메스너는 석양에 물들은 초골리사(Chogolisa·7654m)의 모습을 바라보며 반세기전 이곳에서 조난 당한 헤르만 불을 생각했다. 알피니스트에게서 투어리즘의 변모를 보게 되는 순간이다.

K2는 누구나 아는 세계 제2위의 고봉으로 그 등반의 역사를 새삼 머리에 떠올릴 것도 없다. 오히려 K2에 이르는 길에 눈을 돌려봄이 어떨까 한다. 즉, 아스콜리를 앞두고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노천온천의 정취는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선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또 발토로빙하 한 가운데 섰을 때 자기도 모르게 엄습해오는 고독감을 느끼는 알피니스트는 몇이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어쩌면 이것은 투어리스트의 특권이라 하겠다.

그동안 사람들은 알피니즘 일변도, 또는 투어리즘 일변도로 고집스런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시간이 흐르며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 사고의 전환을 꾀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투어리즘은 오로지 모양새를 갖추기에 바빴고 선진 문명의 모습을 구경하며 돌아다니길 즐겼다. 또한 조용하고 한가로운 이름난 휴식처나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트레킹이라는 새로운 생활의 지혜를 알아낸 서구인들은 일찌감치 지구의 변경과 오지를 골라 나섰던 것이다.

이때 그들 앞에는 자연성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세계가 있었고 또한 원시 시대와 다름없는 농경 사회가 나타났다. 허위와 외식을 모르며 조급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인간의 순진무구한 삶이 거기에 있었다. 진정 알피니스트와 투어리스트가 찾아야 할 이상경은 바로 이런 곳이다.

거기에는 대자연이 발신하는 많은 메시지가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알피니스트와 투어리스트의 새로운 과제다. 그리고 이것에 기본자세가 되는 것은 타성적 일상적 태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리하여 알피니즘의 전통적 유산을 계승하되 그것을 발전시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다.

 

 

**본 글 '월간마운틴' 칼럼에 게재 되었던 글을 필자와 '월간마운틴'의 허락을 얻어 전제한 것임.

 

 

[월간등산 2008년 5월호(통권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