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14. 10:33ㆍ[사람과 향기]/▒ 삶 의 향 기 ▒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림/ 블라디미르 쿠시 작
인간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 고통스러운 삶은 참을 수 있지만 무의미한 삶은 못 참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생각하는 존재로 삶을 의식하며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개념 있는 사람”, “개념 없는 인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개념이라는 단어의 적합한 용법은 아니지만, 여하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 같다.
인문학은 인간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런 성찰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삶, 자기 삶에 대해 반성적 숙고를 하는 삶은 어느 정도 주체적 삶이 된다. 반면에 생각과 성찰이 없는 삶은 남을 따라 하는 삶, 사회가 명하고 요구하는 대로 무반성적으로 순응하는 삶이되기 쉽다. 내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면 결국 남이 나의 삶을 대신 사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하기를, “생각하는 대로 살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리라”고 했다. 생각대로만 살 수 없고 좀처럼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그나마 생각 없이 살면 정말 꼭두각시의 삶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은 자기 존재에 밀착된 즉물적,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의식하고 대상화할 수 있는 ‘대자적’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 존재와 의식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인간의 위대성이자 취약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와 의식이 괴리될 수 있는 ‘이중적’ 존재, ‘자기 분열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기 존재를 완벽히 소유하지 못한다. 인간의 행동은 또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동물과 달리 우물쭈물 불확실하며 인간의 삶에는 고민과 방황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 고민과 방황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성찰할 수 있으며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도의 지성을 발전시켰다. 종교와 철학, 문학과 예술, 과학과 기술 등이 모두 의식적 존재인 인간의 산물이다. 동물들에도 어느 정도 지성이라는 게 있지만 자의식은 없는 것 같다. 필시 언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의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데 기초하고 있다. 누구도 동료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 이용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구조적 취약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거기서 종교의 유래를 찾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자기분열을 재통합 하려는 강한 욕구가 있으며, 종교는 불안을 안고 사는 존재인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frame of orientation), 그리고 몸과 마음을 바칠 궁극적 헌신의 대상(an object of devotion)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다시 인문학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로 부른 파스칼은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지만 온 우주보다도 위대하다고 한다. 우주는 나를 생각하지(의식하지) 못하지만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인간은 주체, 우주는 객체라는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이 말 한 마디로 근대적 주체성을 일깨우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며 근대 사상의 초석을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적 관심은 개인의 발견, 의식하는 주체의 자각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자기로부터 이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속에 얽혀 있는 사회적 자아로부터도 이탈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가 인간이며, 인문학은 여기서 시작한다. 엄청난 외부적 힘과 압력이 나를 에워싸도, 어마어마한 공권력이 모진 고문을 가한다 해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것이 개인의 주체성과 내면성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체로 살지 않으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의미의 틀 속에 갇혀 살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 나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지, 내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사는지 모르고 산다. 인문학과 더불어 사회과학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알아야만 한다. 깨어 있는 의식, 깨어 있는 양심이 지키는 사회가 투명한 사회이며, 그래야 개인도 나라도 제대로 된다.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는 함석헌의 외침은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명언이다.
안개속 산책/사진 박승화 기자
주경야독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요즈음 우리 사회는 야독 무용론에 빠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책을 안 읽는 국민도 없을 것 같다.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휴대폰을 비롯한 각종 영상매체의 위력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게다가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 장시간 노동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한다. 낮이면 정신없이 일하다가 저녁이 되며 이런저런 핑계로 술로 흥청망청하다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유가 없다. 배우자나 자식과 제대로 말 한번 섞어 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 내가 왜 그렇게 바삐 돌아다녔는지 물을 여유가 없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자기성찰은 사치가 될 정도다. 우리 사회는 또 일반적으로 반지성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묻기 좋아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까다롭고 까칠한 사람으로 왕따 당하기 일쑤다. 문제가 있어도 왜냐고 묻기가 거북한 것이 우리 사회이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사회가 권위주의, 획일주의, 순응주의 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우선 “의미가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의미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어떤 행동이 의미가 있다는 말은 우선 이유가 있다는 말이고, 이유가 있다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떤 행위자가 말하는 자기 행동의 이유와 목적에 우리가 반드시 찬동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그 행동에 이해할 수 있는 의미와 목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미 있는’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해도, 왜 그러는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면 적어도 그것은 ‘의미’ 있는 폭력이다. 반면에 아무 이유 없이 행사되는 폭력, 그야말로 폭력을 위한 폭력을 우리는 맹목적 폭력, 전혀 의미 없는 폭력(영어로 senseless violence라고 하지만)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상적, 사회적 ‘의미의 틀’ 속에서 자기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행위를 한다. 이 사회적 의미의 틀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상식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시되어서 ‘왜냐고’ 묻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직장인들은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출근을 한다.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다가 유난히 교통이 막히고 짜증이 나면, 내가 매일 왜 이 짓을 해야 하나, 이 직장을 꼭 다녀야만 하나,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의문들이 생기면서 ‘의미의 위기’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의미의 위기는 실직이나 이혼, 건강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더욱 심각해진다.
직장 생활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위기 같은 것은 흔히 그때뿐이고 곧 잊어버리거나 무시해버리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골치 아프다”, “생각해봤자 별 수 없다”, “시간 낭비일 뿐이다”고 무시하거나 애써 외면하기도 하며, “저 친구 또 병이 도졌구나”하고 마치 남의 일인 양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위기가 깊어질수록 지금까지 작동하던 의미 체계로는 좀처럼 대처하기 어려워지고 급기야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하는 순간에 봉착한다. 삶의 궁극적 목적과 의미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한다. 나는 정말 행복한가? 가족을 위해서 참아야 하나? 인생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삶이 정말로 좋은 삶(good life)인가 등 평소에는 외면하거나 묻어 두었던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회의가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너무 자주 생기면 곤란하겠지만, 가끔 씩 생기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유익하다. 사실 그런 회의가 전혀 없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자의식, 자기성찰이 전혀 없는 사람, 그야말로 철저히 ‘사회화’된 사람이다. 자기 역할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해서 쓸데없는 말이라고는 입 밖에 내지도 않고 농담이라고는 모르는 사람, 기계처럼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을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본다. 사람이 가끔 엉뚱한 짓도 하고 일탈도 하기 마련인데, 매사에 정확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은 사회의 ‘모범생’으로 사람들의 칭찬은 받을는지 모르나 인간으로서의 매력도 재미도 없는 사람이다. 인문학적 성찰과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 사회화가 지나치게 잘 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좀 심하게 표현하면, 인간으로서 ‘소외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아는가, 사실은 남모르는 고민과 갈등을 억누르며 살고 있는지.
영어로 인격(체)을 뜻하는 ‘pers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라틴어 ‘persona’에서 온 말인데, 본래 로마 시대에 연극하는 사람들의 ‘탈’ ‘persona’을 뜻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사람들임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지금은 입적하셨지만 통도사에 경봉 스님이라는 큰 스님이 계셨다. 그분의 설법 가운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말씀이 하나 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니 연극 한번 멋지게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물론 인생이 연극임을 잘 알고 사신 분이었을 것이며, 그 배후에는 우리의 참나, 곧 벌거벗은 맨 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에 대한 자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연극임을 모르고 너무나 빡빡하게 산다는 사실이다. ‘현실’에 밀착된 ‘현실주의자’로 너무나 치열하고 심각하게 산다. 사회에 함몰된 사회적 자아(social self)를 자기의 전부이며 진짜 자기라 여기면서.
나 자신의 경험도 잠시 털어놓으려 한다. 대학 교수 생활 20여년에 싫증이 낫고 회의가 들어 다른 삶을 갈망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다 때려 쳐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조기은퇴를 선택하게 되었다. 남들이 들으면 돌았다고 할 것이다. 팔자 좋은 짓이라고, 아직 고생을 덜 해 보았다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명색이 평생 종교와 철학이라는 것을 붙들고 산 사람이 그러면 다른 사람은 어떻겠냐고 비난과 충고를 함께 할 친구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남들은 모르는 게 자기만의 인생이다. 심지어 매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아내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 내면이다. 최근 어느 교수도 나 같은 ‘병’이 도졌는지, <희랍인 조르바>에 대한 서평을 쓰다가 아예 교수직 사표를 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의 화두는 희랍인 조르바처럼 ‘자유’였던 것 같다. 그의 묘지명에는: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들은 이야기라 확인이 필요하지만). 여하튼 교수도 교수이기 전에 한 인간이다!
우리나라 4-50대 가정주부들이 많이 앓는 잘 알려진 병이 하나 있다.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정신없이 살다가 40대 후반 쯤 되어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나는 무어냐?”는 의문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자기를 완전히 상실한 채 껍데기 인생을 살았다는 허전함과 허무감이 엄습하면서 심각한 ‘의미의 위기’를 맞는다. 고민을 드러내기도 어렵고 마땅히 대화할 상대도 없다. 어쩌다 겨우 용기를 내어 남편이라는 자에게 속내를 드러내면 돌아오는 소리는 “팔자 좋은 소리하고 있네, 밖에 나가 돈 한번 벌어봐라!”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를 찾고 싶은 강한 욕구, 가정주부 이상의 ‘의미’를 찾고 싶은 욕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심하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과감히 변신을 꾀해보려 하지만 뾰족한 수도 없고 능력도 용기도 나지 않는다. 직장 남자들만 사표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부들도 ‘사표’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서울 난지캠프장/사진 박미향 기자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 말고 더 깊고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대면하기를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해온 사회적 역할에 충실했던 삶이고 그런대로 ‘성공’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삶이었기에, 애서 쌓은 사회적 명성과 자존심에 단단히 포장되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기를 거부하고 인정하기도 싫기에 참나(진아)를 찾고 대면하기가 두렵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피하고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외면하면 할수록 참나가 부르는 소리가 더 강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죽음 앞에서 결국 나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참 모습을 대면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부질없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참회’하게 된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철이 너무 늦게 드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사회적 자아의 탈과 짐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를 만끽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겠지만 자유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는 곧 짐이 되고 마는 것이 자유의 역설이다. 갑자기 실직한 사람이나 퇴직한 사람에게 물어보라! 사람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자유도 좋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냐가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 혹은 소극적 자유(freedom-from)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 혹은 긍정적 자유(freedom-for)이다. 자유가 공허한 자유, 허무적 자유가 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보람 있는 삶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공허한 자유, 자유를 위한 자유는 오히려 짐이 되고 만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전 존래를 두고 헌신할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적,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나아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의미의 위기는 산다는 것 자체가 의문시될 때 가장 심각하게 대두된다. 삶이 부분적 위기가 아니라 전적인 위기에 봉착할 때이다. 위기 가운데 위기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죽음이다. 병마와의 투쟁, 사업의 실패나 실직, 이혼이나 가정 파탄과 같은 다른 위기들도 극복하기 쉬운 것은 아니나, 죽음의 위기와 비교하면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누구나 반드시 봉착하게 되는 인생 최대의 위기이다. 모든 가치, 목적,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위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을 ‘곱하기 제로’로 표현한다. 아무리 큰 숫자라도 제로로 곱하면 제로가 된다. 죽음은 기존에 작동하던 크고 작은 의미체계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지금까지 추구하던 모든 가치들이 갑자기 무의미하게 보인다. 세상이 낯설어 보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삶을 지행해주던 의미 체계가 갑자기 작동을 멈추면서 삶 자체가 올 스톱하는 전적인 붕괴를 경험하게 된다.
의미의 위기는 개인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온다. 지금까지 작동하던 사회 시스템의 상식적 규범과 의미체계가 붕괴되면서 사회 전체가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질 때 직면하는 의미의 위기이다. 우리나라가 겪었던 IMF 외환 위기나 최근 일본 동북부 해안지방을 강타한 쓰나미 같은 것이다. 이런 심각한 의미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봉착하게 되는 문제는 우리에게 과연 위기를 돌파할만한 더 상위의 가치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다. 내가 지금 맞고 있는 이 위기의 순간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정한 가치가 나에게 실로 존재하는가? 극심한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가치, 죽음마저도 넘어설만한 어떤 지고선(the highest good, summum bonum) 같은 것이 있는가? 죽음은 우리를 이런 근본적 문제에 봉착하게 한다.
내가 있는 강화도에 멋진 사람 한 분이 살고 있다.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으면 “빈둥빈둥하는 재미로 산다.”고 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고상한 말로는 ‘유유자적’이라고 부른다고 토를 달기도 한다. “무슨 재미로”라는 물음은 따지고 보면 무엇에 마음을 두고, 무슨 가치에 의미를 두고 사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빈둥빈둥 하는 재미”란 어떤 특별한 재미나 의미 같은 것을 추구하는 건 없고 그저 평범하게 일상적 삶 자체를 즐긴다는 말로 이해된다. 약간 더 확대 해석하면, 인생이 뭐 별 것 있겠는가, 삶에 무슨 특별한 재미나 큰 의미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일종의 체념 내지 달관이 담긴 듯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쉽지가 않다. 그야말로 도인의 경지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음을 비우고 무욕의 삶을 사는 지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를 터득해야 비로소 유유자적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 중세 영성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누가 자기에게 왜 사느냐 물으면 그냥 살기 위해서 산다고 대답하겠다고 했다. 신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실로 파격적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다거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이 나옴직도 한데, 허를 찌르는 듯한 그의 말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일체의 욕망으로부터 - 악한 욕망은 물론이고 선을 이루려는 욕망으로부터도 - 해방되어 삶 자체를 무욕으로 산다는 말이다. 아무 이유 없이(ohne Warum, without why), 아무것도 구하는 것 없이(無所求) 그저 산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고차적 삶이다. 온갖 성취욕이나 가치의 추구, 의미의 추구 자체로부터 해방된 최고의 삶이다. 의미의 포기가 최고의 의미이며 무위가 최고의 행위라는 도가적 역설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자족적인 무위자연의 삶도 역시 하나의 선택이고 목적이다. 일체의 의미 찾기를 포기하는 ‘무의미의 의미’도 또 하나의 의미라는 것이다. 인위적 목적 없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사는 무위자연이 그야말로 저절로 이루어진다면 모르지만, 그것 역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또 하나의 목적이며 가치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사실 그러한 사상은 이미 어떤 가치나 의미를 추구하면서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마지막 결론과 같은 것이다. 인생의 쓴 맛 단 맛 다 본 사람, 그러다 보니 인생은 별 것 아니고 모든 인위적 노력이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다소 냉소적인 인생관이기도 하다. 목적, 가치, 의미 같은 것을 지향하는 삶을 내려놓고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지혜, 자기 분수를 알고 쓸데없이 욕심 부리지 말고 물처럼 부드럽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지혜에 근거한 삶의 길이다.
삶의 성찰에는 동서양 영성의 고전만한 것이 없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의미의 위기를 겪고 깊은 성찰을 한 지혜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무엇이 인생의 지고선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접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성의 대가들은 한 결 같이 인생의 최고 목표와 의미는 참다운 자기인식에 있다고 증언한다.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표피적 자아가 아니라 더 깊이 숨어 있는 심층적 나, 참나(眞我)를 발견하고 실현하여 참사람(眞人)이 되는 것이 인생의 최고 행복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불안과 방황은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단순히 육체와 영혼의 이중구조와 자기분열에 기인하기보다는 더 근원적으로,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의 두터운 표피를 뚫고 들려오는 또 다른 자아의 음성이 우리를 부르고 부추겨서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을 재통합하려는 욕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3의 실재가 우리 안에 없다면 진정한 평화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절대적 헌신의 대상을 찾았다 해도, 그것이 우리 밖에 타자로 존재하는 한 절대적 헌신은 자칫하면 인간소외를 초래하거나 억압의 기재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 또 어떤 약물이나 심리적 테크닉을 동원해서 평안을 구한다 해도, 혹은 예술적 영감이나 감동에 사로잡힌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영성가들은 육체와 영혼 너머에 있는 보다 근원적이고 항구적인 실재에 주목한다. 우리로 하여금 좁고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고 탈피하도록 부추기는 우리 내면의 또 다른 자아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영(spirit, pneuma, purusa), 아트만(atman), 내면의 빛(inner light), 속사람, 영혼의 근저, 불성, 진인, 진아, 진심, 도심, 공적영지(空寂靈知), 본연지성(本然之性), 양지(良知), 지성(intellectus), 씨알, 얼나, 나의 나(I-I)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참나(진아) 혹은 참사람(진인)은 나와 너의 차이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되는 개별적 자아나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아이며 초월적 자아이다. 우리로 하여금 영혼과 육체의 탈(persona)을 벗도록 부추기며, 나와 너의 구별은 물론이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도 넘는 우주적 자아, 신과 인간의 경계마저 무너트리는 신적 자아(divine self)이다.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운 나의 참 자아이며, 나의 영혼의 근저이자 우주만물의 근저/근원/근거/(Grund, ground)이다. 여기서는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 곧 신과의 대면이고 자기 인식이 곧 신의 인식이다. 죄란 초월적 타자로서의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이며, 구원이란 인간이 자기 밖의 어떤 높은 존재에 자신을 몽땅 양도하는 인간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자기실현이다.
내 안에 있는 초월적/내재적 자아에 눈뜸으로 인해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 - 신, 신성(Gottheit), 브라흐만(Brahman), 초정신(Supermind)과 완벽한 일치(unity) 내지 하나 됨(at-one-ment, union)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의 경지로서 범아일여(梵我一如), 물아일체, 신화(deification), 신인합일, 천인합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러한 경지야말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나와 너, 인간과 우주, 혹은 인간과 신의 분리와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적 평안의 경지다. 어머니의 모태(우주의 어머니)로 회귀하는 것과 같고 고향(우주만물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환향/환본/환원(還源)의 경지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일상적 자아, 온갖 욕망에 사로잡힌 좁은 이기적 자아를 벗어나야만 한다. 좁다란 자아의 해체, 무아, 망아, 탈아, 초탈, 죽음을 통해 참나, 참 생명을 얻는 사즉생(死卽生)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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