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4. 12:26ㆍ[사람과 향기]/▒ 삶 의 향 기 ▒
필자에게는 늘 괴로운 종교의 역사적인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되는 종교 집단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는 사실에다가, 그 죽이는 방법 또한 비인간적인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수많은 군중 앞에서! 그 이면엔 통치권자와 타락한 성직자들의 뒷거래, 즉 가진 자와의 결탁 아래서 이뤄졌고 결과란 늘 우매한 민중, 선량한 민중의 피해로만 끝났다.
여기서 하룻길 가까운 곳에 리왈싸로 불리는 산중 동네에 초뻬마란 종교적인 성지가 있다. 그곳은 인도 기존의 힌두교, 불교, 또 자인교나 시크교까지에 속하는 광범위한 성지로써 일 년 내내 순례자가 그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필자가 처음 그곳을 갈 때는 이쪽 티베트 스님들을 그냥 호기심으로 따라갔을 뿐이다. 25년 전이다. 높은 산 위에 어찌 그런 예쁜 호수가 있고, 호숫가에는 소박한 티베트 절 하나와 조그만 힌두 사원 하나가 서로 아담한 배경으로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수에서 약 2km 위쪽 바위산에 동굴이 있는데 여기가 실제적인 성소로 땀을 뻘뻘 흘리며 두세 시간은 족히 걸려 올라가야 했다. 여기가 바로 성지일 수가 있는 성자의 수행동굴인 것이다. 아래의 호수는 이 동굴 수행자의 신통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 올라간 뒤에 눈에 들어오는 히말라야 설산 연봉의 장관은 그야말로 여태껏 올라오며 흘린 땀과 가쁘게 몰아쉰 숨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 그 자체만도 보람과 기쁨이었다. 그러면서 야 내가 정말 성지에 왔음을 스스로 느끼고 신심을 북돋우며 환희의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바위산 동굴 코앞까지 굽이굽이 아스팔트 찻길이 나 있고, 그 옛날 손으로 다져 만든 돌계단 하나하나에 정성이 베인 바윗돌 계단은 없어지고 호화로운 대리석 계단으로 바뀌었다. 호수 주위엔 경쟁이라도 하는 듯 새로 지은 티베트 절이 자그마치 다섯 개가 위용의 자태로 자리하고 있다. 그 다섯 개 중 가장 늦게 지은 절이 제일 규모가 크다는 게 눈에 두드러진다. 처음에 있는 조그만 절은 아예 다른 절에 가려져 있어 거기도 절이 있었던가 할 정도다.
거기에다 어느 날부터 시멘트 철근 공사로 거대한 축대를 쌓기 시작했다. 한 절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어떤 불상을 세운단다. 필자에겐 걱정스러웠다. 그 성지 자체로만 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데 저리 큰 불상이라면 주위와의 조화나 분위기에서 문제가 될 건 데 하면서, 또 이미 주위엔 다른 종교의 신전이 있는데 그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 작업이 무려 십 년이나 넘게 걸리고 있었으니 그 규모가 얼마 만 한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런 공사기간에 주위 인도 산골마을 힌두교 주민들이 이곳 히마찰 주 정부 지사에게 탄원을 하고 시위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즉 기존의 자기들 땅에 저렇게 큰 종교시설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막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쳐내는 격이리라. 다행히도 주지사의 종교적인 넓은 관용의 중재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인도 땅엔 어떤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함께 공존해야 된다는 설득으로 주민들을 달래게 되었다.
드디어 그 공사가 완성되어 이곳 달라 라마의 축성식, 즉 불교 전통의 불상 점안 행사가 예고되었고 올 봄 삼일 간의 축제 행사로 사방에 공고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그 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뉴스가 인도 매스컴에 다 도배를 했다. 이젠 종교적인 행사가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 되면서 큰 문제로, 아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는 꼴로 전락했다. 막상 알고 보니 이 프로젝트를 인도 정부에 허가 낼 때의 조항과 다른 작업, 본래 서류상의 인도에선 난 역사적인 인물 불타 석가모니 불상이 아닌 자기들 종파불교 전통의 한 인물 불상을 조성한 것에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법적인 문제로써 끝내 달라이 라마도 행정적인 서류를 확인하고는 인도 정부의 처사에 어떤 발언을 못 한 것이다. 마지막 그곳을 떠나 올 때 한 말씀이란, “저렇게 크게 돈 들여 만든 불상이 법은 설하지 못해”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결국 인도 망명 53년 동안 달라이 라마의 개인적인 종교행사를 치르지 못한 것은 첨으로 생긴 일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거기엔 큰 돈 들여 만든 거대한 불상이 어떤 종교적인 신앙 행위를 할 수 없는 그냥 큰 시멘트 불상으로만 남아 있다. 물론 불상 얼굴엔 금빛 찬란한 도금과 몸에는 값나가는 여러 가지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다. 최근 어떤 라마가 와서 주민들 모르게 비공식적으로 점안을 했다고는 한다. 그러나 공식적인 개원식은 아직도 못하고 있다.
필자가 이 한자리에서 오랜 기간 살아오면서 많은 가르침 중에서 최고의 배움은 불교가 자비를 바탕으로 민중을 맘 편하게 살도록, 즉 사람을 위한 종교로 배워온 것이다. 처음 망명 초기엔 모두가 법에 대한 진실한 수행으로 누구에게나 존경 받고 인정을 받아왔다. 쉽게 말해서 배고프고 가난하게 살 때는 출가정신을 놓치지 않았다. 승려로서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절하게 간절히 공부했고 검소하게 살며 수행했다. 부처님 제자로서의 근본을 지켜가며 바른 수행집단으로 존재한 것이다. 그런데 이젠 큰 절과 함께 부유해져 먹고사는 것이 다 갖춰지니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쉽게 세계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아직은 젊고 새파란, 소위 린포체라는 스님들, 생각해 보라. 일생 수행해도 어려운 수행 길은 내던지고 티베트 불교만이 하고 있는 예식을 한다고 그 얼마나 나도는지. 하필이면 그 단골 방문 소재지가 한국이라니. 물론 그 행사에는 참가비가 따른다. 종교가 예식에 언제부턴가 얼마짜리라는 가격이 정해져 온다. 한마디로 흥정되는 상품으로 전락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전화에 “어느 OO린포체가 환속한 거 맞아요?”라는 좀 성급한 문의 전화다. “그렇게 들었다”라고 답하니, “에이, 작년 한국 왔을 때 동참금(참가비) 내고 그 린포체한테 관정도 받았는데” 운운 하면서 실망스런 말투다. 아직은 공부해야 될 나이에 많이 나돌더니 이국 여인과 인연 되어 승복을 벗게 되였다고 한다.
사람 몸이란 묘한 것인가. 배부르면 졸리고 헛짓을 한다. 이게 소위 성직자로 이어질 때 사회문제 민중의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근본을 잃어버리게 되어가는 것이다. 신을 팔고 사후 극락이나 천국을 팔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반복해 왔던 게 종교의 역사이기도 했다. 지금도 민중의 돈을 매개로 끝없는 큰 신전과 사원을 새로 더 크게 지어오고 있는 것이다. 명목이야 얼마나 그럴싸하고 좋은가, 성전을 신에게 봉헌한다면서 사후를 보장 받는 듯 하는 보장을 미끼로 착한 민중을 이끄는 일이라니. 사실 신이나 부처가 그따위 신전이나 사원의 불상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와는 먼 종교가 아닌 저속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며 무례이기도 하다. 아니 사기극이다. 나아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이끈다면 그 성직자는 저속하고 비열한 사기꾼에 불과하다.
이곳 달라이 라마의 한탄스런 말씀이 이 글을 대변하리라. 법회에서 수없이 말해 온 것이기도 하다. “요즘 티베트 라마들이 하는 일이라니, 큰 절 짖고 큰 불상 만드는 게 불교인 양 헛짓만 한다. 수행이나 공덕은 토끼 꼬랑지처럼 짧은데, 이름과 명성만큼은 토끼 귀처럼 길다”라고.
필자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위 불상 세우기와 비슷한 일이 생긴 것이다. 십 년도 넘게 추진해오던 일이 있었다. 어느 이름 있는 티베트 린포체가 성도지 부다가야에 황금 미륵불상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불상 자체 크기만 백 피트라니 좌대까지 합하면 기존의 정각 대탑보다 더 크게, 그것도 세계최대 운운의 타이틀을 걸고 전 세계 불자들을 상대로 모금을 해온 것이다. 한국 땅에서도 상당한 모금을 해간 것으로 안다. 필자는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어디서나 반대 의견을 해왔다.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우리 부처님 정각 터인 성도지 자체에 의미가 있고, 그 옛날부터 숭앙해 온 정각 대탑 자체로 불교도 신앙의 의미가 있기에 그 어떤 큰 불상이나 사원 건축을 노골적으로 반대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명함이나 타이틀이 없어 막말로 씨가 먹히겠는가. 사실 부다가야 정각 대탑과 주변 전체가 우리나라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나 석굴암처럼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역사 유적보존물이기도하다.
드디어 불사를 할 수 있는 금액이 다 마련되었는지 부다가야가 속해있는 인도 비하르주 정부에 허가서를 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다. 우리 주에는 어떤 새로운 그런 특정 종교의 큰 신상을 설립할 수 없다고 공언해 버리니 난민으로써 어찌해 볼 수가 없는 상황으로 되어 버렸다.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에 그 프로젝트의 최고 실력자 린포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의 소식을 전달 받았다. 그런 죽음은 사망에 가까운 부끄러운 죽음이었으니까. 천수를 누리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아쉬운 나이에, 또 그런 큰일을 하겠다고 세상 만방을 다니더니 어쩌지 하면서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사실 인도의 가난한 민중을 위하는 데에 그 큰 비용을 쓴다면 우선 사람을 위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법에 맞고 또 이 시대에 해야 할 실질적인 일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가 하신 것처럼 순수한 사람을 위한 봉사의 일은 왜 못할까. 이런 일이 참으로 해야 할 숭고한 우리들 인간의 일이라고 확신한다.
지금도 필자는 그 땅 성도지 부다가야에, 불교도 최고의 성지인 곳에 더 이상 오염시키지 말라며 그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분명하게 반대한다.
늘 말해오지만 불상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의 상징물일 뿐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부처가 되는 가르침을 말했지 불상을 만들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 초기불교에서는 감히 부처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이후 세월 감에 순 인간적인 정서로 부처님을 존경하는 순수한 의도로써 불상을 빚어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이제 불자들도 불법의 요체를 바로 공부해서 깨어있는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무조건 되나캐나 의미 없는 큰 불사에 공덕인지 정법인지를 헤아려 바른 시주를 할 그런 열린 시대이다. 종교인의 본질이라고 할 인간의 영성은 큰 성전이나 사원, 또 커다란 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정화에서 오는 외모가 아닌 내적인 마음의 정화, 즉 물 없이 목욕하는데서 오는 것임을 알아차려야만 한다.
2012년 7월 천축의 우기 철에, 비구 청전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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