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사용설명서

2012. 9. 15. 08:47[사람과 향기]/▒ 삶 의 향 기 ▒

아내사용설명서

 

나를 화나게 하는 남편의 행동이 있다. 악의가 담겨 있진 않다. 내 염장을 지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도 남편의 어떤 행동에 나는 화가 난다. 이해 안 돼도 할 수 없다. 남편은 따진다. 왜 그깟 일에 화를 내냐고.

 

너무 놀라지 마라. 아예 초장부터 딱 까놓고 얘기할 테니까. 남편, 당신은 늘 얘기한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데 익숙하지 않다”고. 문제가 생기면 입 꾹 다물고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기 일쑤고, 한마디 한다는 게 제발 ‘척’하면 ‘척’ 이해해주면 안 되겠냐고 한다. 그런데 당신, 내 맘도 그렇게 척척 이해하나. 당신도 못하는데 나라고 다르겠니? 그러니 이제, 제발 대화 좀 하자! 바야흐로 소통의 시대 아니냐!

 

누가 그러더라. 남편은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란 뜻이라고. “아! 정답이네.” 죽비로 정수리를 얻어맞고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지. 뭔 소리냐고? 왜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상황에, 화가 나는 날이 있지 않나. 딱히 어디 하소연할 데도 마땅치 않은 그런 날. 당신에게 폭풍 ‘뒷담화’를 하고 있는데, 당신이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고 따박따박 따지고 들 때면 그 입술을 그냥 확 잡아 비틀고 싶어진다. 그래, 당신은 내 문제 해결을 위해 조언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화가 누그러진 다음에 애써 그럴 거라고 이해해주는 거다.) 나는 당신에게 해결책을 달라고 한 게 아니다. 그저 “아~ 그랬구나” 하면서 등이나 토닥토닥 해주길 바랐을 뿐이다. 당신은 심판이 아니라 내 편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 극장에 갔다 생긴 일이다. 한 커플이 영화 상영 내내 시끄럽게 떠들길래 내가 “조용히 해주세요” 한마디 했다. 곱게. 그런데 이 커플이 “뭘 얼마나 떠들었냐”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지. 사람들이 등을 돌려 우리를 쳐다보는 그 무안한 순간, 당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억나나? ‘무경우’ 커플 대신 나를 나무랐다고!! “좀 참지 그러냐”고. 남에겐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아내한텐 어찌나 엄격한지. 그 순간 내가 ‘이 남자를 믿고 평생 같이 살아도 될까’ 심히 의심했던 걸, 당신 알기나 아나?

 

우리 ‘맞벌이 부부’고, 나 ‘직장맘’이다. 꿈도 있고 회사에서도 제법 일 잘한다는 소리도 듣는다. 그게 공으로 되는 줄 아나? 발 동동 구르고 사생활도 없이 ‘집-회사-집’ 반복하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야근하고 늦게 들어와도 애들 어린이집 알림장 꼬박꼬박 챙기고, 육아책도 읽으면서 애들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당신은 내 그런 노력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당신은 기껏해야 애들하고 한 시간 ‘반짝’ 놀아주고선 좋은 아빠 노릇 다 한 것처럼 굴면서, 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바빠서 집안 청소 좀 소홀히 했다고 “일이 먼저냐 가정이 먼저냐” 당신이 한마디 했을 땐, 으휴, 정말 복장 터질 뻔했다고. 애는 나 혼자 낳았냐. 난 당신에게 ‘슈퍼맨’이 돼 달라고 하지 않는다. 제발 나한테도 ‘슈퍼우먼’이 돼주길 기대하지 마라.

 

아기를 데리고 외출할 때도 그렇다. 당신은 늘 자기 준비만 끝내놓고 멀뚱멀뚱 기다리기만 한다. 애들 옷 입히고 머리 빗기고 짐 챙기고 하려면 내 손은 열개라도 부족하다. 제발 “빨리 가자”고 재촉만 하지 말고 손발 부지런히 움직여서 척척 애들 좀 챙겨주면 안 되나. 당신이 도와줘야 하다못해 나도 얼굴에 ‘분장’이라도 좀 할 거 아니냐.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것 하나. 당신은 늘 ‘남자’이고자 하면서 왜 스스로 ‘아들’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사소하게는 화장실 쓰고 나면 물이라도 좀 제대로 내리고 나오면 안 되나. 빨래를 안 할 거면 양말이라도 좀 뒤집어 벗지나 말지. 매번 얘기해도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건지. 나를 잔소리하는 엄마가 아닌 다정한 아내로 만들어 달라.

 

은근히 성질나는 게 하나 있다. 간혹 ‘드라마 많이 본다’고 ‘무식한 마누라’ 취급하는데, 그러지 좀 말자. 도대체 내가 드라마 보는 거랑 당신이 컴퓨터 게임 하는 게 뭐가 그리 질적으로 다르냐. 잘생긴 장동건이 “나는 서이수를 사랑하는 오빠” 따위의 오글오글한 대사를 읊는 장면을 보는 게 스트레스를 푸는 내 방식이다. 방식의 차이를 그냥 좀 인정해주면 안 되겠니?

 

아 참, 시댁 얘길 빠뜨릴 수가 없다. 시댁은 남편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곳곳에 매설된 잠재적 ‘지뢰밭’이다. 특히 명절. 시댁에서 음식하고 설거지하고 나 혼자 허리가 휘는데 당신은 룰루랄라 텔레비전 앞에 누워 먹다가 자다가 천국이 따로 없다. 그래 좋다, 거기까진 봐줄 수 있다. 케케묵은 ‘관습’이 어디 하루아침에 바뀌겠냐, 맘 비운 지 오래다. 아, 그런데 왜 내 ‘며느리 노릇’은 당연하고 당신 ‘사위 노릇’은 안 해도 그만인 건가.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나. 살가운 사위 노릇 좀 하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나. 시댁에서와 마찬가지로 입 꾹 다물고 텔레비전만 보다 오는 당신을 보면, ‘아, 전생에 당신은 정말 나라를 구했다’ 싶어진다.

 

또 하나. 제발 시어머니와의 갈등 상황에서 ‘제3자’처럼 굴지 마라. “내가 끼어들어 봤자 싸움만 커진다”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얘긴 핑계처럼 들린다. 따지고 보면 시댁과의 문제는 당신이 중간에서 뭔가 말을 잘못 전달해서 생긴 오해가 상당 부분 아닌가? 내가 바라는 건 무조건 내 편만 드는 불효자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두 여자 사이에서 합리적 ‘중재’ 노력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한참 얘기하다 보니 “머리 아프다”고 돌아선 당신 모습이 그려진다. “남자는 원래 그러니 이해해 달라”며 디엔에이(DNA) 탓하며 어설프게 얘기를 덮을 생각은 이제 그만! 인간에겐 남성성·여성성이 다 있다. “원래 그렇다”는 얘긴 때론 “귀찮으니 대충 넘어가자”는 얘기로 들린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건 정말 별거 없다. 미안할 땐 미안하다는 말, 고마울 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가 전부다. 명품백 척척 안기면 모든 아내들이 헤벌쭉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남편들이 은근히 많던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좋아하는 과자나 케이크 따위를 ‘기억’했다가 퇴근길에 슬며시 사들고 와줄 때 아내들은 더 감동한다.

 

내가 바라는 건 방귀남(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속 남편)이 아니다. 그냥 내 편 ○○○씨다. 여보, 나는 곰국 끓여놓고 놀러 가고 당신은 혼자 식탁에 앉아 청승 떠는 그런 노후를 맞진 말자. 그러니 이 아내, 제발 잘 좀 알고 써달라, 이 말이다. 한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