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단독행의 생명은 그 원형에 있다/혼자 산을 가다

2007. 5. 29. 18:49[알피니즘]/▒ 산 악 칼 럼 ▒

산에서 혼자 가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자기가 좋아서 혼자 다닐 터이니 굳이 그 이유를 물을 것도 없다.
혼자 산을 가는 데는 그것대로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단점도 없지 않다고 본다. 고독과 자유가 무엇보다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산중에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남의 도움을 얻기 어렵다는 커다란 단점이 있다. 근자에 혼자 산에 다니는 사람이 날로 늘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그로 인해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렇게 혼자 다녀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로 오가는 사람이 많은 산길을 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안전지대를 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혼자 산에 가는 것을 등산에서는 글자 그대로 ‘단독행(單獨行)’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영어의 ‘solo’와 독일어의 ‘Alleingang’에서 왔다고 보는데, 여기서도 독일어가 먼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은 등산의 메카인 알프스의 산행 기록 가운데 이러한 단독 산행의 선구자가 독일에서 먼저 나온 것으로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
혼자 산에 간다고 해도 낮은 산과 높은 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낮은 산을 혼자 갈 때에는 외로움과 고요함이 산행에 장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본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돕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고산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이 긴장과 경계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경우에 따라 위험과 직결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낮은 산을 혼자 소요하는 것은 일종의 취미지만 고지대의 단독행은 도전과도 같다.
등산에서 단독 산행이 증가하는 것은 바로 시대의 변천을 뜻한다. 날로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람들이 긴장하며 신경 쓰는 일이 많다보니 그런 주변 환경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려고 한다. 혼자 산에 가기가 쉬워진 것은 이를 위한 준비와 행차와 대상이 그전과 달리 일상생활의 연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독행’에는 처음부터 독자적 세계가 있다. 단독행은 단순한 등산 형식이 아니라 대자연에 대한 독특한 도전 형식과 정신에 있어 일반 산악인들이 체험할 수 없는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거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단독행은 그 자체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에서 나온 <세계산악백과사전>을 보면, 단독행은 문자 그대로 혼자 하는 산행의 뜻으로 ‘등산은 개인에 속하기 때문에 짝을 묶지 않고 혼자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독행자로 독일의 게오르그 빈클러(Georg Winkler·1869~1888)와 일본의 가토 분타로(加藤文太卽·1905~1936) 두 사람을 대표로 들었는데, 이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산에서 사라져 갔다.
그런데 빈클러와 가토의 단독 산행 분위기는 서로 크게 달랐다.

두 사람은 활동한 시대가 다르고 나이도 크게 차이가 있었으며, 그들의 무대 또한 유럽 알프스와 일본 알프스로 자연 조건에서 차이가 있다. 즉 빈클러는 19세기 후엽 북부 칼크·알프스와 돌로미테 암봉을 혼자 오르내리다가 19세 젊은 나이로 서부 알프스의 바이스혼(4506m)에서 실종됐다. 그의 유해는 69년 뒤에 바이스혼 산록 빙하에 나타났는데, 이것은 1924년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 때 실종된 조지 말로리의 시신이 75년 뒤에 발견된 일과 함께 세계 등반사에 기록될 사건이었다.
한편 가토는 당시 산악계에서 독자적으로 단독 산행의 경지를 개척하다 일본 알프스에서 조난했는데, 그가 가고 나서 유고(遺稿)가 <단독행>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일본 산악계의 명저로 남았다.

단독행이 등산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물론 빈클러의 경우지만, 단독행이 가장 돋보여 화제가 되기는 1953년 헤르만 불의 낭가파르밧 등정이었다.
당시 독일의 운명의 산, 마의 산으로 여겨지던 표고 8125m 히말라야 고봉을 고소캠프(6900m)에서 자정이 지난 오전 2시에 혼자 행동 개시하고 17시간 뒤 정상에 섰다가 최종 캠프로 하산, 도중에 선 채로 비박하는 등 일찍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극한 상황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했다.
이러한 불의 역사적 단독행 뒤를 이은 것이 라인홀트 메스너의 낭가파르밧 단독행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78년의 일인데, 그 해 봄 메스너는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등정하고 석달 뒤 낭가파르밧을 알파인 스타일로 혼자 올랐다. 역사상 처음으로 8000m 고소 무산소·연속·단독 등반이라는 난제를 그는 초인적 성취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알라인강 낭가파르밧>은 그 때의 기록인데, 서구 등산계에 ‘단독행’이라는 말이 등반기 표제가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메스너는 ‘단독행이란 혼자 베이스캠프를 떠나 정상에 섰다가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며, 헤르만 불처럼 고소캠프부터 혼자 올라가는 것은 단독행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메스너의 단독행 풀이는 그것대로 옳겠지만 거기에도 문제는 있다. 그것은 단독행의 동기다.

즉 단독행은 동기에 따라 그 순수성과 신선함이 좌우된다. 그런 뜻에서 가장 진정한 단독행은 역시 게오르그 빈클러의 경우다. 알피니즘이 아직 시대적 각광을 받지 않던 19세기 후엽에 그는 혼자 산을 헤매는 것 외에 의식한 것이 없었다. 기록도 공명도 염두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메스너의 단독행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낭가파르밧을 그의 말대로 ‘베이스캠프에서 베이스캠프로’ 오르내렸지만 그의 머리에는 헤르만 불이 ‘고소캠프에서 고소캠프로’ 오르내린 것을 의식했으리라. 불세출의 거인 헤르만 불을 어떻게 해서라도 넘어서려고 했던 것이다.
등산 행위로서의 단독행은 반드시 등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단독행의 의의와 가치는 단독 산행 그 자체에 있다.
거기 단독행의 순수함과 신선함이 있다. 그러나 단독행에는 필연적으로 곤란과 위험이 따르는데, 단독행에서 이것과 싸워 이길 때 그 세계는 돋보인다.

1880년의 머메리의 에귀 뒤 제앙 단독 등반을 비롯하여, 1955년 쁘띠·드류 남서릉에 대한 월터 보나티의 단독 초등,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5년의 마터혼 북벽 동계 단독 직등이 그 좋은 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남을 의식하지 않았고 오직 알피니스트로서 새로운 과제를 좇았다.
단독행은 사람에 따라 그 내면의 세계에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단독 등행자는 그들의 세계를 전개하게 되는데 빈클러는 고독과 자유를 만끽하다 끝내 생애를 마감했고, 머메리는 머메리즘의 주체답게 불확실성과 싸우는 과정에서 ‘by fair means’라는 슈퍼알피니즘 키워드를 남겼다.
한편 보나티는 5일간의 처절한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샤모니 침봉군에 ‘보나티릉’을 영원히 새겼다. 이밖에 아이거 북벽을 단독 속공한 놀라운 기록도 두 차례나 있었지만 그들의 성취는 한때 큰 화제를 불렀을 뿐이었다. 그것은 결코 독자적 세계가 아니었고 단순한 기록 경신이었기 때문이리라.

1982년 메스너는 에베레스트를 북쪽에서 역시 무산소 단독 등정을 이룩했으며, 알프스 3대 북벽을 하루에 오르는 믿기 어려운 거사도 있었다. 확실히 그들의 강인한 체력과 의지는 인정되나 반면에 기교와 재치와 과시가 너무 전면에 나타나 있다.
단독행의 생명은 단독행 원형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남난희의 태백산맥 종주에서 본다. 1984년 새해 벽두, 남단 금정산 정상을 떠나 홀로 76일을 추위와 심설과 허기 그리고 그보다 더한 외로움과 싸우며 끝내 북단 향로봉에 도달한 그녀의 단독행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출처 : 울산산울림산악회
글쓴이 : 피츠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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