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알피니스트의 하루/극한 상황에 맞선 영광과 비극의 기록

2007. 5. 29. 18:50[알피니즘]/▒ 산 악 칼 럼 ▒

알피니스트의 하루/극한 상황에 맞선 영광과 비극의 기록

글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


등산가의 하루를 이따금 생각해 본다.
등산가들은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며 그 날이 어떻게 끝날까 궁금하다.
등산가는 산에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 서재에서 산에 관한 책과 등산 장비들을 만지며 하루를 지내지 않을까 싶다.
가스통 레뷔파가 자기 산행의 하루를 <별과 눈보라>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침에 단잠을 깨면 으레 산장의 창 너머로 날씨를 본다.
아침식사를 어두운 밤에 하니 식욕도 없다.
그리고 나서 등불을 앞세우고 길을 떠나노라면 그제야 해가 떠오른다.
산행길에 부딪쳤던 이런 일 저런 일들… 정오 가까이 되어 산장에 돌아와 테라스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등산가 레뷔파의 하루가 언제나 이처럼 평온하고 한가로운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거친 알프스의 눈과 얼음 세계에서 오랜 세월 보내며 많은 책을 썼고, 만년에 병을 얻어 파리에서 짧지 않은 생애를 마감했다.
즉 레뷔파는 보기 드물게 충실하고 행복한 일생을 보낸 산악인이었다.
그런데 등산가로서 그 세계의 하루하루가 결코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많이 본다.
우선 에드워드 윔퍼의 경우가 그렇다.
히말라야가 세상에 알려지기 훨씬 전인 19세기 중엽, 윔퍼는 알프스 최후의 보루였던 마터호른에 5년에 걸쳐 7전 8기 도전했는데, 그 마지막 하루가 그에게는 운명의 날이 됐다.
다시 말해서 1865년 7월 13일 그날, 윔퍼 일행 일곱은 드디어 표고 4478m 마터호른의 역사적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을 시작하자, 로프가 끊어지며 일행 중 네 명이 1000m 절벽으로 추락하는 대참사를 빚었다. 이 일로 윔퍼는 알프스를 떠났지만 그는 행복한 산악인이었다.

그 뒤 그는 산악의 고전이고 명저인 <알프스 등반기>를 남겼고, 노년에 다시 마터호른을 찾아가 지난날을 회상하는 아름답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등산가로서 인류 문화사에 영원히 기록된 사람으로 조지 말로리를 앞서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산행의 하루로 그가 유명해졌다면 그것은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이야기다.
말로리의 불후의 명성은 에베레스트가 무대였고, 그가 정상을 눈앞에 둔 8500m 고소에서 극적으로 실종됐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록은 이렇다.
‘6월 8일(1924년) 아침, 날이 밝자 말로리와 어빈은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불과 1㎞ 정도 지점에 친 작은 2인용 천막에서 눈을 떴다.
한편 아래의 제5캠프에서 그들을 지원하던 오델이 말로리와 어빈이 정상 공격에 나서고 있는 동안 제6캠프로 식량과 연료 등을 올리기 시작했다.
날씨는 좋았고 춥지도 않았다.
그런데 고도가 높아지며 안개가 정상 부근을 휘감기 시작하더니 눈보라 돌풍이 엄습했다.
오후 1시 조금 전, 오델이 제6캠프까지 240m 정도 남겨놓고 있을 무렵, 주위에서 안개가 걷히고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이 보였다.
이때 설사면에서 점 두 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정상이 다시 구름에 덮였다.
’오델은 구름이 다시 걷혔을 때 두 점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때 그들의 하루는 75년 뒤인 1999년 말로리의 시신이 극적으로 발견되기까지 긴 세월 세계 산악계에 수수께끼로 남아 숱한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등산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으로 기록되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하루는 1936년 7월 중순 아이거 북벽에서 토니 쿠르츠가 직면했던 바로 그날일 것이다.
이때 상황은 훗날 아이거의 초등을 쟁취한 하인리히 하러의 <흰 거미>에 잘 나와 있다.
당시 뛰어난 클라이머였던 힌터슈토이서 등 네 명이 알프스 최대의 벽에 초등을 노리고 도전했었는데 동료 셋이 추락하고 혼자 남은 쿠르츠가 검은 벽에 매달려 살려고 악전고투했지만, 비보를 듣고 달려온 구조대와 불과 피켈 하나의 거리를 두고 끝내 숨졌다.
벽등반에서 추락하는 일은 결코 적지 않으나 아이거에서 쿠르츠가 당한 비극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유례가 없다.

이에 대해 <등산 100년사>를 쓴 아놀드 런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대담한 심장이 풍설과 전존재, 불행과 공포와 싸웠다.
이것은 다른 등산가가 같은 처지에서 결코 그렇게 싸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쿠르츠는 자일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노출되고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생을 포기하지 않고 죽었다.
등산 역사에서 그토록 강인하고 영웅스러운 인내는 일찍이 없었다.
’알피니즘의 세계가 극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는 불가피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속에서 영광과 비극이 극도의 명암을 그려내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본다.
1950년 6월 3일 프랑스 등반대의 안나푸르나 초등의 하루가 그런 날이었다.
인류가 처음으로 8000m 고도를 넘어선 이 등반에서 대장 모리스 에르족이 라슈날과 함께 역사적 초등을 성취했지만, 그들은 손발에 심한 동상을 입고 하산하며 지옥 같은 하루를 맞았다.
당시 그들을 후원하고 차등을 노리던 리오넬 테레이와 가스통 레뷔파가 없었던들 두 등정자가 살아서 산을 내려올 가망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테레이와 레뷔파도 설맹으로 고생했는데, 그날의 일을 에르족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라슈날이 발이 아프다고 야단이다.
우리는 지금 동상에 걸렸는지 모른다.
그래도 해볼 만한 일인가? 이것은 정말 대답하기 어렵다.
나는 이것을 자기에게 물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갑자기 라슈날이 나를 붙들었다.
‘내가 돌아가면 어떻게 하겠나?’ 수많은 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토록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목표가 눈앞에 있다.
‘나는 혼자 가겠다.
’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 그래서 우리는 형제처럼 전진했다.
”이런 싸움으로 에르족은 손가락을 모두 잃었다.
그야말로 영광의 부상이라고 혹자는 말할는지 모르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비싸고 무서운 대가였다.
그런데 이것은 남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박훈규가 있다.
1979년 매킨리 도전에서 고상돈·이일교와 함께 정상에 섰다가 하산길에 셋이 800m 설벽을 추락, 둘이 죽고 박훈규만 살았다.
이때 그는 손가락을 거의 잃었다.
그런데 박훈규의 시련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1976년 2월 16일, 설악산에서 에베레스트 원정을 위한 훈련을 하다 눈사태로 일행 여섯 명이 매몰됐을 때 혼자 튕겨 나와 동료 둘을 살렸으니 그는 그야말로 두 번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이렇게 알피니즘 초창기부터 그때그때 이어진 알피니스트들의 영광과 비극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하루를 고른다면 1953년 7월 3일 헤르만 불이 표고 8125m 낭가파르바트를 고소 캠프에서 혼자 오르고 돌아온 그날일 것이다.
1932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동대가 도전하면서 23년 동안 두 번의 대참사로 25명이 희생된 ‘마의 산’ 낭가파르바트에서의 일이다.
당시의 등반 기록인 <8000m 위와 아래>에 붙인 권두언 ‘땅과 하늘 사이의 방랑자’에서 필자 루르트 마이크스가 이렇게 논평했다.
‘이성이 가리키는 온갖 법칙에 따르면 그는 정상에서 다시 밑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공산이 컸다.

히말라야 등산 역사에서 불이 정상에 오른 일과 맞먹는 육체적·정신적 행위를 찾기 어렵다.
과연 지금까지 전날 아침 고소캠프를 젊음에 찬 얼굴로 떠났다가 다음날 저녁 늙은이가 되어 돌아온 등산가가 있었던가?’낭가파르바트 단독행에서 불에 닥친 무서운 시련은 하산길이었다.
그는 내려오며 그 죽음의 지대에서 선 채 긴 밤을 지새웠다.
먹은 것 마신 것 없는 41시간의 단독행의 한계 상황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싶다.
출처 : 울산산울림산악회
글쓴이 : 피츠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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