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무즈타가타 해외원정 등반기 14

2007. 6. 4. 16:45[사람과 산]/▒ 해 외 원 정 ▒

7월 29일 토요일 22일차
텐트안에서 3주 이상 생활하다가 침대위에서 자니 오히려 느낌이 이상하다. 모처럼 편안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원정기간 동안 몇 일을 제외하고 줄곧 나와 함께 지내신 단장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시는 습관이 몸에 베어서 그런지 항상 나보다 1~2시간 먼저 일어나신다. 이번 원정기간 내내 사소한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단장님의 빈틈없는 세심한 배려에 오히려 대장을 맡고 있는 내 자신이 송구스럽게 느껴진 적이 여러번 있었다. 직장에서는 수십명의 부하직원을 거느리는 대표이사로써.. 사회단체에서는 수백명의 회원들을 원만하게 통솔하는 그 리더쉽이 존경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빈틈없다고 하는 내가 감탄할 정도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 식사 문제도 분명히 어제저녁 쿡인 김영걸에게 지시를 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녀석이 아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준비를 제대로 해 놓지 않았다가 단장님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하는 수 없이 호텔옆에 딸린 식당에서 쌀알이 둥둥 떠 다니는 맛없는 죽과 딱딱한 빵, 달걀후라이로 아침을 대신한다. 아침을 먹고나서 픽업트럭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들마저 감감소식이다. 분명히 아침 10시까지 호텔로 우리를 태우러 오기로 했는데 연락도 되지 않아 마냥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하기야 아직 우리가 차량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다시 올 것이지만 약속 시간을 안 지키니 화가 난다. 10시 10분정도 되자 트럭이 호텔로 우리를 태우러 왔다. 그들은 시장에서 채소와 생필품을 구입하며 자신들의 볼 일을 다 본 후에 느긋하게 오는 것을 보니 속이 터진다. 내가 참아야지...우리는 이곳 타쉬쿠르칸에서 유일하게 정부에서 운영하는 위그루족 박물관으로 관람을 갔다. 박물관에는 위그루민족 역사의 과거에서 현재까지 생활상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시간 일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도중에 나와야 했다. 이곳 사람들은 생김새가 흡사 이슬람권 민족과 비슷하며 옷차림 또한 중국인들과는 사뭇 달랐으며 특히 얼굴에 두르는 수건인 히잡을 쓴 여성들도 많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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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바쉬에서 카쉬가르로 이동하기 위해 대행사에서 제공하는 버스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타쉬쿠르칸을 뒤로 하고 출발했다. 타쉬쿠르칸 변방지역중에 광활한 초원지대가 있는 곳이 있는데 수 많은 조랑말과 야크 등의 짐승들을 놓아 방목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모래로 이루어진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이곳에 그러한 광활한 초원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바쉬 도착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픽업 운전사를 독촉하여 수바쉬캠프를 향하여 엑셀을 밟는다. 그런데 아니다 다를까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는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 부터 또 우리가 탄 픽업트럭이 고장을 일으킨다. 처음 몇 차례는 돌로 두드려서 시동을 거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 이후로는 돌로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이 없다. 날씨는 덥고 시간은 바쁘고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우리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운전사 녀석은 대책이 없는지 아예 연료 파이프에서 휘발유를 물통에 한 통 빼내어 연료기화기 뚜껑을 열고 조금씩 직접 주입하여 시동을 걸어서 겨우 몇 백미터 가다가 그 기름이 떨어지면 차가 멈추고..일련의 이러한 행위를 반복하기를 수십 차례..대원들은 이제는 아예 체념한 듯 아무 말이 없이 메마른 사막만 바라보며 한 숨만 내쉬고 있다. 시간은 벌써 오후 2시를 넘어서고 마음만 다급해지고 있는데 드디어 고갯마루가 보인다. 이제 연료를 2~3차례만 더 부으면 고개를 넘어 설수 있을 것 같다. 트럭을 운전하는 그 녀석도 우리에게 미안한지 그저 겸연쩍은 웃음만 보일 뿐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영어도 전혀 통하지 않는 녀석이니 뭐라고 지껄여 봐야 우리 목만 아플 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서 수바쉬를 향해서 가다 보니 오른쪽 멀리 무즈타가타가 웅대한 위용을 뽐내며 우뚝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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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방향에서 보는 무즈타가타는 수바쉬캠프 지역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확연하게 다르며 산의 경사도가 직접 등반하면서 체험한 것과 비슷하게 가파르게 솟아 있다. 수바쉬캠프에서 보면 무즈타가타의 경사도가 아주 완만하게 보이지만 실제 등반을 해보면 밑에서 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수바쉬캠프에 도착하니 앞서간 차량은 이미 오후 1시경에 도착해 있었고 카스에서 온 버스는 우리를 기다리다 지쳐 가이드와 기사가 카라쿨리 호수로 관광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컵라면과 즉석 쌀국수로 점심을 대신하고 오후 3시반경 짐을 모두 버스에 싣고 그동안 정들었던 무즈타가타와 작별을 고하고 카쉬가르를 향하여 출발했다. 올 때와 달리 버스가 빠르게 달려 4시간 정도 걸려서 카쉬가르의 셔먼호텔에 도착했다. 역시 위그루 무희들이 우리의 도착을 환영하는 춤 공연을 펼쳤지만 이제는 무감각해진 듯 대원들의 반응이 신통찮다. 우리는 서둘러 방을 배정하고 짐을 정리한 후 버스를 타고 당소강 카스 가이드가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한다. 카쉬가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음식점인 짐일식당이라는 곳이었는데 우리팀을 특별 손님으로 대우하면서 가장 큰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 방에는 약 25명이 둘러 앉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원탁 테이블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테이블이 약간의 힘만 주어도 회전한다는 사실이었다. 방안에는 우리가 초청한 당소강 가이드의 친구들과 베이스캠프에서 쿡 보조로 일하던 고용인 2명등 많은 사람들로 방안이 가득찼다. 우리팀의 카스 대행사 가이드인 당소강씨는 이미 여러차례 각국의 해외원정대를 이끈 훌륭한 가이드로써 지난해에는 K2 베이스캠프까지도 원정대를 이끌고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성품도 온화하며 정도 많고 의리도 있는 멋진 가이드였는데 우리 대원들이 모두 좋아했다. 특히 단장님이 고소증이 악화되어 베이스캠프에서 카스로 요양을 나갔을때 그에게 여러날 동안 극진한 대접과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씀 하셨다. 당소강씨가 우리팀에게 감사의 표시로 가져온 여러병의 귀한 고량주로서 여러 차례 축배를 하면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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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일요일 23일차
지난밤 기분좋게 취했던 여흥을 털어 버리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타쉬쿠르칸에서는 열악한 샤워시설로 인해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이곳 카쉬가르의 셔먼호텔(중국어로 색만빈관)은 그런대로 샤워시설은 양호한 편이다. 단, 한가지 물의 성분이 아주 센물이라서 비누를 많이 사용해도 촉감이 너무 뻣뻣해서 느낌은 별로 좋지 않다. 무즈타가타산 주변은 온통 사막지대이다 보니 그곳에서는 몇 일만 생활해도 온 몸이 먼지투성이가 된다. 그렇지만 물이 부족하다 보니 제대로 씻을 수도 없어 온 몸이 근질근질해 지는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응력은 탁월해서 일주일만 지나면 그 상황에 이미 적응하여 무감각하게 된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대원들의 얼굴이 모두 부시시해 보인다. 어젯밤 모두 무리해서 그런가? 셔먼호텔 옆에 붙어 있는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만 하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야채로 요리한 음식은 양배추 요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기름이 범벅된 요리가 나오기 때문에 잘 먹지 않는다. 오이, 양파, 고추, 피망, 감자 요리 등은 그런대로 먹을만 하다. 20여일 이상 중국 음식에 길들여진 대원들은 웬만한 음식은 다 잘 먹어도 여전히 인기가 없는 음식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오늘 일정은 카스 시내를 관광하는 날이다. 오전 10시경 버스를 타고 타클라마칸사막으로 투어를 나선다. 타클라마칸사막은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이란 의미라고 하는데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길이가 수백킬로미터나 된다고 하니 정말 엄청나다. 해마다 봄이 되면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불청객 황사의 진원지가 바로 타클라마칸사막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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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로 약 2시간반을 달려서 타클라마칸사막 투어용 관광지로 개발해 놓은 곳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제법 큰 오아시스(거의 호수 크기임)가 있고 물놀이 기구와 사막 낙타투어, 사막 튜닝카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음식점도 여러곳이 있다. 우리는 먼저 사막 튜닝카를 타기로 하였다. 인공적으로 모래언덕을 만들어 놓고 그 사이 사이로 달리는 튜닝카 체험은 스릴 만점이다. 급경사 사면을 넘어설때면 모두 고함을 지르며 짜릿한 쾌감을 만끽했다. 튜닝카 체험을 끝내고 도착했을 때 김헌남 대원이 자신의 카메라를 사용한 후 밸트쌕에 넣고 지퍼를 잠그지 않아서 그만 모래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다고 한다. 카메라를 잊어 버린 것 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안에 들어있는 자신의 정상등정 사진이다. 그는 정상에서 나에게 자신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내 카메라에는 그의 정상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카메라를 찾기 위하여 다시 튜닝카를 타고 가서 찾아 보았지만 이미 여러대의 튜닝카가 지나가면서 모래속 깊이 파묻혀서 찾지 못했다고 한다. 무릇 대부분의 일이 다 그러하듯이 사소한 부주의로 인해서 발생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곤 한다. 그나마 내 카메라에 나의 정상 사진이라도 들어 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어느 원정대처럼 정상 사진 없는 원정대가 될 뻔 했다. 다음 코스는 낙타투어 체험이었다. 한 시간 코스와 2시간 코스도 있었는데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안된다는 것을 억지로 부탁해서 우리는 30분간만 낙타투어를 하기로 했다. 난생 처음 보는 낙타를 직접 타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랜다. 낙타 등에 나 있는 두 개의 혹 중간에 안장을 만들어서 사람이 탈 수 있게 해 놓았다. 모래언덕을 지나서 가도 가도 모래 밖에 보이지 않는 사막으로 낙타를 타고 가면서 내가 먼 옛날 실크로드를 주름잡던 대상이 되는 상상을 해 본다. 낙타투어를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하니 색다른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 양고기를 쇠창살에 끼어 흙속에 파묻은 항아리 모양의 화덕속에 넣어 숯불로 구워낸 양고기구이의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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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투어를 마치고 다시 향비묘(香妃墓 / 아팍호자묘)를 관람하기 위해 이동한다. 죽은 사람들까지 관광상품으로 이용하는 중국인들의 상술이 놀랍다. 향비묘는 카쉬가르시에서 북동쪽으로 5㎞ 지점에 있으며 이슬람교식 고대 건축물로 1640년에 짓기 시작하여 1693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니 3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아팍호자는 17세기 카쉬가르 수피즘(백산당)의 대표자로 이 묘에는 그의 아버지를 비롯 5대에 걸친 72명의 가족들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며 제1대는 유숩호자이지만, 아들인 아팍호자가 더 유명하여 전체 능묘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리운다고 한다. 또한 청조 말기 위구르족으로서 건륭제의 첩이었던 “향비”(香妃)가 묻혔다는 전설에서 향비묘라고도 불리운다. 향비는 아팍호자의 5대째 자손이며 그녀의 몸에서는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그 설은 여러가지가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1760년 청조가 건륭제 때 군사 침략을 단행한 뒤,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아 북경에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와 향비의 오빠와 삼촌이 건륭황제 때 청조에 큰 공을 세워서 건륭황제가 이 가족들을 모두 북경으로 초청했는데, 그 때 향비의 미모가 건륭황제 눈에 띄여서 건륭황제(1736-1795)의 명으로 고향을 떠나 비(妃)가 되었지만 곧 죽게 되고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겨 안장하였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그녀는 카쉬가르에서 한 족장의 부인이라고도 했고, 또 정혼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26살 때(1760) 청나라의 자금성에 들어온 뒤, 29세 때 사망하였다고 하며, 어떤 이는 25년간 자금성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그녀는 망향병에 시달려 생활이 무척 힘들었다고 하며,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건륭제는 이를 위해 그녀의 생활터전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을 정도였고, 그녀가 위구르의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특별히 그녀를 위해 위구르의 조복(朝服)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궁중에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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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비의 실존 근거는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서 벼슬을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그렸다는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 차림을 한 여인이 있는데 이 그림에 찬자불명(撰者不明, 글 쓴 이가 분명치 않음)의 사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고 한다.

“향비는 회부(回部, 신강성 남부)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에 온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들여 소원을 묻자,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 또한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쉬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이다. 아마 위구르인들은 청의 황제 건륭제에게 끝까지 몸을 허락치 않고 저항한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고, 사후에도 그녀의 무덤을 통한 그 욕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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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비묘 관람을 마치고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할겸 카스의 재래식 바자르(시장)로 이동했다. 카스에서 열리는 바자르에는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바자르와 매일 열리고 있는 바자르 등이 있다고 한다. 이 바자르에는 온갖 종류의 수공예품이 펼쳐지는데, 항상 이곳 주민들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더 많다고 한다. 일요 바자르에는 약 10만 명의 위구르인, 아프가니인, 파키스탄인, 카르키즈인, 타지크인, 몽고인 등의 민족들이 모여드는데, 주요 거래품목으로는 후추열매, 석류, 포도, 의류, 펠트카, 보석으로 장식된 칼, 부츠, 낙타, 양 등이며, 파시미나 실크목도리와 실크스카프는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우수하여 선물용으로 아주 좋은 제품들이다.

호텔로 돌아와 위그루인들의 민속공연을 관람하면서 저녁을 먹고난 뒤 우무루치로 이동하는 국내선 항공기를 탑승할 때 오버차지를 지불하지 않기 위해 전 대원들의 짐 중량을 체크해서 수하물로 수송하는 짐은 무조건 20kg 미만으로 줄였다. 그래도 남는 짐은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스키플래이트는 오버차지를 지불하기로 하고 스키부츠를 포함안 나머지 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내 핸드캐리 수송을 하기로 하였다. 30~40리터의 소형 배낭에 짐을 가득 채우니 무게가 거의 15kg이나 된다. 11시경 우루무치로 이동하기 위해 카스 대행사 가이드인 당소강씨와 작별인사를 하고 셔먼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우루무치 공항으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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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자연과 삶의 향기
글쓴이 : 피츠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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