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회색빛 고독속의 하얀 독백
2007. 5. 29. 23:46ㆍ[알피니즘]/▒ 바람과구름 ▒
2003년 3월 16일
일요일 아침 모닝콜 알람소리에 반쯤 감긴눈으로 겨우 일어난다. 와이프와 같이 딸도 외출하
고 집안에 덩그러니 혼자 맞는 아침이다. 어제저녁 마켓에서 사온 냉이를 넣고 떡국을 끓였
다. 살짝 맛을 보니 향긋한 봄 내음이 흠뻑 묻어나온다. 녹차를 끓여 한잔 마시고 나서 보온
물통에 가득 채웠다. 집을 나서니 잿빛 하늘이 금새라도 빗방울을 뿌릴듯 찌부둥하다.
오늘의 산행 출발지인 청도군 운문면 삼계리 쌍두봉가든을 향하여 엑셀을 세게 밟는다. 운문
령 고개를 넘어갈 즈음 가는 빗방울이 토독 토독 찻창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 마음
은 청량한 산 공기로 인해 저만치 앞서 이미 산 중턱을 올라서고 있다. 쌍두봉 가든앞에 도착
하니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미리 예견한 날씨여서 별 문제가 없다. 오버 자켓을
입고 신원천을 건너 천문사앞에 도착하니 시계가 9시를 가르키고 있다. 천문사 바로 앞 왼쪽
능선으로 올라가면 쌍두봉을 거쳐 상운산을 갈수 있고 임도를 따라 가지산으로도 갈수 있다.
잠시후 나선폭포 입구를 지나 9시 30분경 배너미재에 도착했다. 옛날 전설에 이고개로 배가
넘어 다녔다고 하니 대체 무슨말인지 아리송하다.^^
배너미재에서 오른쪽 급경사 능선길로 올라가면 지룡산으로 갈수 있고 지룡산 직전 봉우리에
서 오른쪽 희미한 길은 나선폭포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길은 운문사 사리암으로 내려가는 길
이다. 지룡산을 지나 능선길로 계속가면 운문사입구 주차장으로 내려 가는 길이다. 배너미재
왼쪽 능선길은 쌍두봉과 상운산으로 가는 길이다.
상쾌한 공기를 폐 깊숙히 들어 마시며 잠시 휴식한 뒤 고개너머 급경사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이 길로 가면 운문학심이골 하류로 내려선다. 중간에 수십개의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로 떠 받
쳐둔 배바위가 나타난다. 길다란 마름모꼴 바위가 집채만 한데 금방이라도 한쪽으로 기울어질
것 처럼 생겨서 사람들이 우스꽝스럽게 나무 막대기로 받쳐 두었는데 그 가냘픈 막대기가 바
위를 지탱하고 있을까? 웃음이 절로 나온다. 9시 55분경 학심이골 하류에 도착했다.
맑은 계곡물을 한컵 마시고 오늘 올라갈 가지산 북서릉을 쳐다보니 중간정도 부터 눈이 하얗
게 쌓여있다. 빗방울이 조금 굵어진다. 하지만 봄비는 내 마음속에 파아란 새싹을 돋게 하고
세속에 찌든 내 영혼을 말끔히 씻어준다.
학심이골 하류 계곡을 건너서 왼쪾 넓은 길은 학심이 계곡을 따라 가지산임도로 올라가는 길
이다. 이 운문학심이골은 10여년 전만 해도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비경의 계곡미를
자랑했으나 요즘은 많은 등산객들이 다녀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비취빛 소와 폭포들이 즐비
한 그야말로 영남 알프스 최고의 청정계곡이다. 오른쪽 넓은 길로 약 5분정도 내려가면 왼쪽
에 또 하나의 지계곡이 합류하는데 이 지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심심이골을 거쳐 운문산 아랫
재로 올라간다. 계속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운문사 사리암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가지산 북서릉으로 오르기 위해선 계곡을 건너자 마자 똑바로 보이는 희미한 길로 직진하면
금방 작은 능선에 올라선다.
이제부터 고행의 시작이다. 이길은 가지산 정상에 도착할때까지 거의 급경사 오르막길인데
가지산 등산로중 최난코스이다. 특히 겨울시즌에는 초보자들은 절대 이길로 가면 안된다.
또한 여름시즌이라고 해도 노련한 산꾼이 아니라면 이 코스로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군데 군데 암벽이 있어 자칫하면 사고가 일어날수도 있다. 2~3년 전인가 등산객이 조난당해
야간에 구조하러 갔던 사람이 도리어 암벽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기도 하다.
또 이 코스로 가려면 반드시 계곡에서 식수를 준비해서 가야한다. 중간에 물한방울 구경할수
없기 때문이다.
약 10여분 올라 가다보니 앞에 펀쵸우의를 뒤집어 쓴 두명의 등산객이 앞서가고 있었다.
40대 후반정도의 남녀였는데 차림새로 보아 이길을 끝까지 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손에 낚싯대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겨우살이 약초를 채취하러 가는 것을 알수 있다.
허나 차림새로 보아 전문 약초꾼은 아닌데 최근에 사람들이 겨우살이가 몸에 좋다고 하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무분별하게 남획되고 있는 실정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자신의 건강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서 약초에 의지해서 건강을 지키려
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불가피한 유전적인 질병도 있겠지만....
나는 지나치면서 한마디한다..겨우살이도 멸종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그 사람들 속으로
뭐라 했는지는 모르지만...
급경사 오르막을 1시간정도 올라서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서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갑자기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나타난다. 학심이계곡쪽에서 운무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데 중간에
하이얀 꽃잎같은 눈이 아주 넓게 섞여 지나간다. 정말 황홀한 풍경이었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늘은 철저히 혼자이다. 아무런 속박도 없이 나 혼자만
의 자유를 만끽할수 있는 산행이다. 이러한 산행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드물게 한번씩
혼자만의 산행을 하곤 한다. 내 자아속에 감추어진 자신을 깊이 성찰해 보고 지나온 내 삶을
반추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이제 능선의 중간정도 올라왔다고 생각하는데 빗줄기가 갑자기 눈보라로 돌변한다.
나는 바람이 불지않는 능선아래로 조금 내려가서 오버트라우저를 입고 장갑도 방수용 장갑을
꺼냈다. 이미 예상한 기후였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추위에 대비한다.
자연은 준비된자에게만 기쁨을 선물하고 준비되지 않은자에게는 시련만 안겨준다는 진리를
절대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귀에 꼽았던 MP3 이어폰을 빼고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웅장한 심포니를 감상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능선으로 올라섰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다가 이제 거의 무릎 반정도 빠진다. 아이젠도 안 가져왔으니 사이드스텝
으로 조심 조심 올라야 한다. 나는 집에 몇개의 아이젠이 있지만 일반 워킹용 아이젠은 없고
20포인트 아이스클라이밍용만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피츠로이가 예사 산꾼이 아니
라는 것을 단번에 알수 있을 것이다. 결코 나 자신을 으시대려는 것이 아니며 어차피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면 나에 대한 모든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하므로 미리 귀뜸을 해주는 것이다.
눈보라가 점차 거세게 몰아치고 기온도 영하로 뚝 떨어지고 체감온도는 더 더욱 내려간다.
하지만 이정도의 시련은 가볍게 극복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즐긴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얀 눈보라의 선율이 솜털같은 운무를 타고 심연의 나락으로 침몰하는 장엄한 광경을 상상
해보라..그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인간은 자연과 일심동체가 된다.
저 멀리 운무사이로 하얀소복을 입은 운문산이 잠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몇번의 미끄
러운 클라이밍 지역을 지나 청도 귀바위에 도착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문다. 나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씩 담배를 피운다. 마치 슬라이드 쇼와
같은 대자연의 황홀한 광경에 넋을 놓고 바라보다 따뜻한 녹차를 한잔 마시면서 지나온 내 삶
을 잠시 반추해 본다...
10여미터의 암벽을 누가 메어두었는지 고마운 로프를 잡고 조심스레 내려선다. 이제는 눈이
무릎까지 빠져든다. 시계는 이미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가지산정상은 얼마 남지 않았
다. 갑자기 싸락눈을 동반한 세찬 눈보라가 몰아친다. 얼굴이 따끔 따끔할 정도다. 오버자켓
모자를 뒤집어 쓰고 희미한 눈 발자국을 쫓아 오른다. 약 10여분 올라가니 솔잎이 막 내린
눈가루로 하얗게 화장하고 나를 반기고 가는 나뭇가지에는 맑고 투명한 상고대가 피어있다.
가지산 정상은 희뿌연 안개로 덮혀 있었다. 나는 정상에 올라가지 않고(너무 많이 가서^^)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음식물을 파는 천막안으로 들어갔다. 맙소사! 천막안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나는 배낭을 한켠에 내려두고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삼계리에서 가지산 정상까지 3시간 30분 소요되었다. 일반인들은
아마 이곳까지 오려면 적어도 4~5시간은 족히 걸릴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한 무리의 일행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천막을 빠져 나간다. 나는
구석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빵 몇개와 함께 녹차를 마셨다. 소주를 한잔 하려고 하다가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싫어서 이내 배낭을 메고 천막을 나섰다.
하산로는 쌀바위로 내려가는 길을 잡았으므로 이제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알파인스틱에 의지
하면서 선채로 신나게 미끄럼을 타면서 내려간다. 이러한 자세를 등산용어로 스탠딩 글리세
이딩이라고 하는데 숙련된 자만이 할수 있다. 아울러 이렇게 내려가면 아주 빠른 속도로 내
려갈수 있는데 다소 위험하기도 하다. 정상에서 불과 20여분만에 쌀바위에 도착했다. 쌀바위
옆에도 천막이 하나 있는데 그곳 주인장인 털보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다. 문을 열고 들어
가니 혼자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반갑게 맞이한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지 않고 조용해서 좋다.
나는 소주를 한잔 하기로 했다. 어묵을 몇개 시켜 털보 주인장과 같이 소주를 몇잔 마셨다.
털보왈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점심을 먹지 않고 맛있게 술을 마실수 있었을텐데..지금은 배
가 불러 술맛이 없다나..ㅎㅎ 그말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그와 나는 소주를 2병 마셨다.
더 이상 술을 먹게 되면 하산해서 운전하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그만 먹기로 했
다. 한병 정도의 소주는 아직 걸어야 할 길이 2 시간 정도 남았기 때문에 가뿐히 해독이 된
다. 음식값을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해서 오가피술을 한병 사고 배낭에 남은 빵과 귤과 간식
등을 모두 건네주고 천막을 나섰다.
임도를 따라 약 10여분 내려오다 하산 코스로 잡은 운문학심이골로 내려선다. 이 길은 쌀바
위에서 임도를 따라 약 10여분 내려오다 왼쪽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자칫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내려서자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그러나 고맙게도 누군가 먼저
지나간 흔적이 있어서 쉽게 내려설수 있다. 이 코스 역시 겨울에는 등산객들이 잘 다니지 않
는 곳이다. 약 30여분 내려오다 보니 왼쪽에 학소대 폭포가 허연 포말을 이루며 물줄기를 뿜
어대고 있다. 이제는 눈이 차츰 사라지고 길흔적이 희미해 진다. 봄비에 묵은 겨울때를 말끔
히 씻은 나무가지들이 시야에 아주 선명하게 들어선다. 이어서 비취빛 학심이골 계류가 주위
나무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한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꽃고 내가
좋아하는 브람스의 헝가리무곡을 들으면서 사뿐 사뿐 계곡을 내려선다. 한참 내려가는데 저
앞에서 다람쥐 한마리가 먹이를 찿는지 깡충 깡충 뛰어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게 잠시 멈추어 서서 바라본다. 저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먹이는 많이 비축해두고 겨울을 보냈을까? 다람쥐가 계곡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다시
가던길을 재촉한다.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오늘 내가 올랐던 가지산 북서릉이 도도한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다.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한번 담아본다.
어느듯 학심이골 하류 출발점에 다다랐다. 이제 지나간 길을 그대로 뒤돌아 나가야 한다.
차가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온길을 다시 돌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마냥
느낌이 좋고 너무 행복한 산행을 하였다. 이제 내일부터는 다시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의욕이 넘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날으는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출처 : 자연과 삶의 향기
글쓴이 : 피츠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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