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31일
밤새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텐트문을 여니 약 20cm의 눈이 쌓였다. 지나온 흔적도 지나간 흔적도 감쪽같
이 지워졌다. 사랑의 고통도 삶의 번뇌도 이처럼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쉽게 지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제는 등반 첫날이라서 대원들이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3인용 텐트에 익스
피디션 침낭 3개을 깔고 3명이 잔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3명이 누우면 꼼짝도 할수 없을 정도로 협소
하다. 더구나 텐트 바닥을 제대로 다지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나 보면 울퉁불퉁 매치바가 되어 허리도 아프고
하옇튼 나는 등반 난이도 보다 텐트에서 자는 것이 더 끔찍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니시호타카리지에서 비
박하다간 밤새 꽁꽁얼어서 아침엔 불귀의 객이 될것이다. 또한 이루트에는 마땅히 설동을 팔만한 장소도 없
기 때문에 이곳을 등반하려면 반드시 텐트를 가지고 가야함을 명심해야 한다. 이곳을 등반하는 일본인들도
텐트만큼은 꼭 가지고 등반한다고 한다. 또 필수적인 장비로는 눈삽을 들수 있는데 설사면을 깍지 않고는
텐트 한동도 마땅히 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팀은 눈삽을 대원 1명당 한자루씩 준비
했는데 덕분에 신속한 시간안에 텐트를 4동이나 설치해야 하는 캠프사이트를 금방 만들수 있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캠프를 철수 하고나니 9시가 넘었다. 텐트를 철수할때 알루미늄 폴이 얼어 붙어서 잘
안빠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때는 가스 버너로 녹여서 빼는 것이 제일 좋은데 너무 많이 가열하면 폴대 내부
의 고무줄이 늘어나거나 타버리는 경우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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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알프스의 설경 |
개스와 눈과 바위 |
개스속으로 출발 |
출발 준비를 마치고 오늘도 험난한 루
트를 향하여 출발이다. 캠프사이트에서 약간 왼쪽으로 돌아 10여분만에 니시호타카 정상에 올라선다. 니시
호타카 정상은 자리가 좁아서 많은 인원이 머무르기에는 부적합하며 좌우측은 절벽지대이므로 조심해야 한
다. 잠깐 기념촬영을 하고 오른쪽으로 약 7~8미터 나아가 스노우 바를 2개 설치하고 대원들을 하강시켰다.
이곳은 하강 길이는 짧지만 큰 배낭을 메고 클라이밍 다운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소 위험하기 때문
에 대원들을 모두 하강시키고 라스트는 배낭을 달아 내리고 스노우 바를 회수하고 클라이밍다운하게 하였
다. 잠시후 또 한번의 하강지점을 통과하는데 이곳 역시 2년전에는 작은 나무에 슬링을 걸고 하강하였으나
지금은 나무는 눈속에 묻혀버렸는지 흔적도 없었다. 하는수 없이 다시 스노우 바를 2개 설치하고 하강을 하
였는데 클라이밍 다운하기에는 다소 위험한 지역이어서 스노우 바를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하강하여
로프를 회수 하였다. 이 코스는 약 20~30미터 정도 하강해야 하는데 매년 적설량에 따라 지형이 변한다.
2년전에는 이곳에 하강을 할수 있는 쇠사슬이 있었는데 올해는 눈이 많이 와서인지 쇠사슬을 찾을수가 없었
다. 또 그때는 하강루트가 오버행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하강하기가 다소 불편했으나 이번에는 별 어려움 없
이 하강할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뾰죽한 형상의 피너클 암봉이 나타나는데 눈이 많으면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으나 눈이 별로 없을때는 바위가 드러나 등반하기가 까다롭다. 피너클을 넘어서면 약간
편편한 안부가 나타 나는데 이곳에도 설사면을 깍아 내면 그런대로 텐트 한 두동 정도는 설치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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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능선의 눈처마 |
눈으로 뒤덮힌 위험한 리지 |
니시호타카 정상 |
이 지점이 아이노다케를 올라가는 출발점인데 눈이 별로 없을때는 낙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며 러셀
흔적이 없으면 자칫 루트를 잃을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한다. 북 알프스의 모든 등반루트에
는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 크고 편편한 바위면에 붉은색이나 노란색 또는 흰색의 페인트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놓은 곳이 많은데 바로 그것이 등반루트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하지만 눈이 많이 쌓이게 되면 이 표식이
눈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올해는 이루트에 눈이 많이 쌓여 로프를 설치하지 않고 자유등반
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눈이 많이 덮여 낙석 위험도 현저히 줄어든것 같다. 우리는 별 어려움없이 모두 아이
노다케에 도착했다. 모두 알파미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하였다. 아이노다케는 2년전에 등반와서
이곳 경사면을 어렵게 눈삽으로 컷팅하여 캠프를 설치하였던 곳인데 그때는 밤새껏 눈이 많이 내리고 폭풍
설이 몰아쳐 잠도 제대로 잘수가 없었다. 그때 이 암봉을 지나 40여미터 하강후 기상이 급격히 악화되어 다
시 클라이밍하여 후퇴한 곳이어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휴식을 마치고 위로 10여미터 올라 짧은 나이프리
지를 약 5~6미터 가면 슬링을 걸수 있는 비석모양의 돌기둥이 나타나는데 이곳에 슬링을 감아 하강을 하면
되는데 약 40여미터를 하강해야 한다. 이곳 또한 눈이 많지 않을때는 낙석이 심한 곳이므로 조심해서 하강
해야 한다. 하강후 좁은 리지를 약 10여미터 트레버스하여 지나면 작은 콜이 나타나는데 캠프사이트로는 별
로 적합하지 않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텐트 한 두동을 설치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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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암설벽 |
뒤돌아 본 니시호리지 |
바위능선을 따라... |
이후 바위에 설치된 쇠사슬을 따라 오
른후 약간 밋밋한 안부에서 왼쪽으로 약 15미터 정도 트레버스 하면 역층슬랩으로 이루어진 바위에 쇠사슬
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위면이 미끄럽고 쇠사슬이 얼어 있어 선등자가 등반한후 로프를 설치하고 쥬마링을
하는 것이 힘도 절약되고 안전하다. 여기서 암설 혼합지역을 약 1시간 정도 오르다 보면 마지막 부분에 눈이
다소 많고 작은 바위 몇 개를 오르면 덴구노가시라 정상이 갑자기 나타난다. 벌써 오후 4시가 다되어 간다.
덴구콜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릴것 같은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덴구노가시라에서 덴구콜까
지는 캠프사이트가 없기 때문이다. 덴구노가시라를 지나고 부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기온이 급강하
하기 시작한다. 나는 서둘러 대원들을 독려하여 덴구콜을 향해 출발했다. 대원들도 이제는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나는 대원들에게 어둡기 전에 덴구콜에 도착해야 한다며 다그치기 시작한다. 6시 반쯤 덴
구콜이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이 급경사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클라이밍다운 하기가 위험
하다. 선두 1~2명을 내려 보내고 나서 날도 어두워 지기 시작하여 나는 쇠사슬이 설치된 곳에 확보를 하여
대원들을 하강하도록 했다. 이곳은 절반쯤 하강하여 왼쪽으로 트레버스 하면서 덴구콜로 내려가야 한다. 계
속 똑바로 내려가면 한참을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덴구콜에 도착하니 일본인 2사람이 이미
눈을 깊숙히 파내고 텐트를 설치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덴구콜에서 오른쪽으로 다케사와 쪽으로 등산
로가 있지만 동계에는 엄청난 눈이 쌓여 통행이 불가능하며 일본인도 겨울에는 전혀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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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구노가시라 피크 |
위험한 피너클암봉 등반 |
암, 설, 빙 혼합등반지역 |
내가봐도 눈이 어림잡아 골짜기에 수십미터씩 쌓여 있어서 잘못 들어 갔다가는 일본산악인 이야기처럼 눈속
에 빠져 여름이나 되야 사람을 찾을수 있을 것 같았다. 즉 바꾸어 말하자면 이 덴구콜에서 다케사와 쪽으로
지도상에 나있는 루트는 동계에는 등반 불가능이며 탈출 또한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봤을때는
차라리 반대편 신호타카 계곡쪽으로는 다소 위험하지만 탈출은 가능할 것 같아 보였다. 대원이 모두 하강하
고 나니 이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둘러 캠프사이트를 깍아내기 시작했다. 눈이 크러스트가
많이 되지 않아서 설사면을 깍기가 한결 쉬웠다. 하지만 바닥이 바위면에 떠 있어 자칫하면 설사면이 무너져
내릴것 같아 불안했다. 우리는 안쪾부터 눈을 다지면서 바깥쪽으로 나아갔다. 일부는 스노우 블록을 쌓고 일
부는 캠프사이트를 닦고 전 대원은 숨돌릴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기온은 시시각각 수직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간신히 텐트 설치를 완료하였다. 이 덴구콜은 3인용 텐트를 약5~6
동은 칠수 있을 정도로 자리도 넓고 눈도 많았다. 일본인들도 주로 이곳에서 캠프를 설치한다고 한다. 우리는
각자의 텐트에 배낭을 정리하고 어젯밤과 같이 눈을 녹여서 물을 만들고 알파미로 저녁을 지어 먹었다. 오늘
은 등반 이틀째여서 장비가 많이 젖었다. 장갑도 말리고 스키고글도 말리고 젖어 있는 마음도 말렸다. 어젯밤
너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밤새 잠못이루던 생각이 나서 오늘은 가능한 늦게 잠자리에 들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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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속에 묻혀버린 암봉 |
눈속에 묻혀버린 산들 |
바위속에 묻혀버린 대원들 |
오늘밤은 바람도 많이 불지 않고 하늘엔 구름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옆 텐트에선 벌써 드르렁하고 코고는 소
리가 들린다.^^ 텐트안이 답답하여 볼일도 볼겸 인너부츠를 신고 텐트문을 나서니 밤하늘이 더없이 맑다. 수
많은 별들이 니시호타카리지를 아름답게 밝혀주며 히뿌연 설릉의 실루엣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순간 불현듯
가스통 레뷰파의 "별빛과 폭풍설"이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가 함께 오르고 있는 동안 나도 특별한 행복감이 새로이 솟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처음에 그것이 등반에서 오는 것같이 느껴졌으나 내 입가에 떠오르기 시작
한 노래는 분명히 다른 데 그 근원이 있었다. 사실 우리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분위기와 대지의 울렁거림,
산속 대기의 맛과 햇볕의 빛남이라는 요소들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하나의
향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틀림없는 진실은 우리 두 사람이 바위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같은 별
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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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능선 다케사와리지 |
장관을 이룬 구름바다 |
대원을 깊이 파묻고도 남을 눈 |
그렇다. 우리는 함께 니시호타카리지에 왔고 같이 등반 하면서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개스속에서 태어
나듯 나타나는 뾰죽한 봉우리와 광활하게 펼쳐진 운해를 바라 바라보면서 이따금 행복감에 젖곤 하였었다.
지금 이순간 더없이 아름다운 별들을 감상할수도 있지만 살을 에는 폭풍설이 언제 불어닥칠지 모른다. 등산
이란 이 모든 상황을 즐기면서 극복하고 자신의 인내력과 의지의 한계를 시험할수 있는 좋은 취미라고 생각
한다. 하지만 극도로 위험하고 험난한 등반에서는 등반가의 생명조차도 담보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한배
를 탔고 모두가 힘을 합쳐 힘껏 노를 저어야 항구에 다다를 수 있다. 밤하늘이 맑아서 내일은 날씨가 좋겠다
는 생각이 드니 마음에 다소 위안이 된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콩나물시루 같은 텐트에 침낭을 펴
고 자리에 누웠다. 어젯밤에 너무 추워서 한잠도 못잤다는 김원수 대원의 이야기를 듣고 침낭을 어떻게 덮
고 자야 하는지 설명을 해 주었다. 침낭입구에 조임끈이 하나 있고 목부분에 보면 또 하나의 조임끈이 있다.
이 목부분의 조임끈을 제대로 조여주지 않으면 침낭내부에서 체온에 의해 데워진 따뜻한 공기가 쉽게 밖으
로 빠져나가 밤새 체온이 많이 내려가 추위에 떨게 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도 추우
면 입구 조임끈까지 조여주면 한결 따스하게 밤을 지샐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돌발 상황
이나 취침중 산소의 결핍으로 인해 가위눌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침낭조임끈
을 반드시 자신의 손이 쉽게 닿을수 있는 가슴팎에 올려두어야 한다. 이따금 쿨럭이는 대원들의 기침소리만
허공을 맴돌뿐 임오년 마지막 밤이 아쉬운지 이제 바람소리도 고요함도 모두 잠들었는지 아주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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