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니시호타카의 별빛과 폭풍설...[5]

2007. 5. 29. 23:58[사람과 산]/▒ 해 외 원 정 ▒

2003년 1월 2일
몇 일 만에 아주 편한 잠을 잔 것 같다. 넓고 편편한 마룻바닥에 지붕이 있는 산장은 우리에게 호텔이나 다름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니 대원들은 벌써 아침을 준비해서 차리고 있었다. 산장 밖은 여전히 폭풍설이 위협 적으로 불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먹고 점심용으로 김밥을 준비한 뒤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일본팀에게 몇 시에 하산하냐고 물으니까 자기들은 아침 7시경 출발할 예정이란다. 배낭을 패킹하고 있는 데 일본인들이 산장문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 폭풍설이 너무 세게 불어서 자신들도 선뜻 출발할 엄두 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 망서리더니 3명의 일본인들이 먼저 출발한다. 우리는 산장 콘크리트 바닥을 빗자루로 깨끗이 쓸고 휴지 한 조각도 남김없이 주워 비닐백에 담고 머물고있는 일본산악인들에게 작별을 고 하고 전대원이 스키고글과 아이젠을 단단히 착용하고 아침 7시 40분경 산장문을 나섰다. 호타카산장에서 가 라사와 다케리지 하산 지점까지는 약 30분이 소요된다고 한다. 단단하게 크러스트된 능선으로 올라서자 마 자 폭풍설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30kg이나 되는 배낭을 메고도 중심을 잡을수 없다. 한 순간 방심하다간 배낭 을 맨 채로 쳐박힐 지경이다. 몇 스텝 걷다가 피켈에 의지하여 바람을 피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는데 앞서간 일본인들도 정신을 못차리고 허리를 구부린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우리는 같이 하산하기로 하고 그들이 먼 저 앞장서서 설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전혀 없다. 나는 고개를 갸웃뚱하면서도 그들의 뒤를 쫓아 내려갔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강력한 폭풍설은 우리의 안면을 사정없 이 후려친다. 설상가상으로 내쉬는 입김이 스키고글에 얼어붙어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제기럴 이러다가 설벽 아래로 추락하는 날엔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스키고글을 목출모위로 벗어 버렸다.

약 15분 가량 앞서서 내려가던 일본인이 큰소리로 나를 부른다. 나는 얼른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자기들도 폭풍설로 인해 루트를 잘못 착각한것 같다며 건너편에 보이는 리지가 하산루트인것 같다고 했다. 이런 날라리 같은 쪽바리들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으나 그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 은 뒤돌아 올라가서 건너편 리지로 이동한다고 했다. 정명환대원은 아무곳이나 그냥 치고 내려가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북알프스의 산세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하산루트를 잘못 들어서면 천길 낭떠러지로 들어설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 안된다고 했다. 대원들은 광란하는 폭풍설에 망연자실하게 고개를 숙이고 피켈에 의 지하며 체감온도 영하 40~50도에 이르는 기온으로 인해 급격한 체온저하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대장인 나 는 지체없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건너편 리지와 중간 쿨르와르를 살펴본 후 다이렉트로 트레버 스 하기로 작정하고 대원들에게 뒤를 따라오도록 지시하였다. 강력한 눈보라가 사람을 허공으로 날려 보낼 기세로 불어 댄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바람이 잠시 약해지면 빠르게 5~6스텝 이동하고 또 피켈에 의지하 여 중심을 잡고 잠시 후 또다시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으로 암설 혼합 쿨르와르를 트레버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고 머문다는 것은 곧 죽음 자체라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고개를 돌 려 뒤돌아 보니 대원들도 사력을 다하여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힘들게 트레버스가 끝나는 지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다닌 러셀 자국이 뚜렷히 나타났다. 일단 하산루트는 제대로 찾은 셈이다. 하지만 광란의 폭풍설 은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사정없이 전신을 후려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틈도 없이 리지를 클라이밍 다운하기 시작했다. 피켈과 아이젠을 이용하여 빠른 동작으로 암설리지를 내려갔다. 별로 어려운 루트는 아니었지만 폭풍설로 인하여 시야를 제대로 볼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리지 왼 쪽은 끝이 없는 설벽이고 오른쪽은 천길 절벽이다. 한참 내려가다보니 왼쪽 설사면으로 2명의 일본인이 올 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위험한 리지를 버리고 설사면으로 트레버스하여 일본인이 올라오고 있는 쪽으로 내 려 갔다. 2명의 남녀 혼성팀이었는데 이러한 악천후에도 등반하는 그들이 진정한 산악인이다. 나는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계속 사이드 스텝과 킥스텝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 서 고함소리가 들여온다. 재빨리 뒤돌아 보니 백두일 대원이 슬립하여 막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큰소리로 제동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다행이 4~5미터 미끄러져 내려오다 멈추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기분 이었다. 제동이 되지 않고 끝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대원들 중 4~5명을 제외하고 는 국내에 설사면 추락 제동훈련을 할 만한 대상지가 없어서 그에 대한 제동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는데 천만다행이다.

※ 사진을 더블 클릭하면 더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호타카산장에서 취사중인 대원들 가라사와다케를 등반중인 대원 리지를 하강하고 있는 대원들

한참을 클라이밍다운 후 다시 스노우 리지로 건너갔다. 급경사 설벽을 트레버스하여 암설혼 합지대를 한참 내려가니 다소 완만한 지형의 설사면이 나타났고 그곳에는 5명의 일본 산악인들이 휴식을 취하 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바람을 피하며 휴식하기로 하고 그들 곁에 다가 갔다. 나는 그 중 리더인듯한 일본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설동을 구축하여 훈련하고 하산하는 길이라 한다. 남자 2명과 여자 3명의 팀이었다. 여자 대원들도 나이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정도 되어 보였는데 대단한 여성산악인들이라 는 생각이 든다. 일본팀 리더가 나에게 지금 보이는 설벽을 올라가면 커니스 지역인데 조심해서 통과해야 한 다며 주의를 준다. 다소 낮은 곳으로 내려오니 폭풍설의 기세가 한 풀 꺽이는 듯하다. 일본팀이 먼저 출발하 고 뒤이어 우리도 출발했다. 약 40미터의 설벽을 올라서니 커니스로 형성된 스노우 나이프리지가 나타났다. 리지의 폭이 불과 50cm도 안 되는 것 같다. 이곳을 지나다 잘못하여 바람에 균형이 깨지면 오른쪽 천길 아 래 절벽으로 추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몇 미터 앞서 가던 김원수 대원이 한 순간 오른쪽 스텝이 무 너 지면서 그대로 주저 앉는다. 나는 뒤에서 죽고 싶냐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원수는 사색이 되어 겸연쩍은 얼굴로 겨우 일어나서 조심조심 건너가기 시작한다. 이 루트는 흡사 히말라야의 캠프 루트 뺨치게 아주 위험 한 곳이었다. 위험지역을 지나서 다소 완만한 봉우리에서 모두 모여 간식과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이제 정말 위험한 지역은 다 지나온것 같다.

약 45도 경사의 설벽을 50여미터 클라이밍 다운하니 이제부터 부시지대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눈이 허벅지 까지 빠진다. 급경사 지역은 아예 엉덩이를 깔고 미끄러져 내려 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래도 주위에 나무가 있어 붙잡으면서 내려 가니 한결 수월하다. 11시쯤 작은 캠프사이트가 나타났는데 3~4동의 텐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러명의 일본산악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우리도 먼저 내려온 몇 명의 대원들부터 휴식을 취하며 후미 대원들이 도착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중 조금전에 만났던 일본인팀의 여자 대원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기는 한국 서울에 있는 북한산 인수봉에 록 클라이밍을 하러 한 번 갔었고 자기 친구 한 사람은 한 해에 2~3번씩 꼭 인수봉에 록 클라이밍하러 간다고 했다. 리더인 남자대원은 나이 가 50대 초반은 되어 보였는데 자신은 히말라야 등반을 열 번이나 갔다 왔다고 하면서 카자흐스탄, 인도, 파 키탄, 네팔 등 자기가 다녀온 국가를 열거하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나도 91년도에 파키스탄 히말라야 가셔브룸 2봉을 등반한 적이 있다고 하니 아주 반색을 하면서 이 북알프스에서 자신이 만난 한국산 악인들중에 히말라야를 다녀온 산악인은 내가 처음이라고 이야기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그는 또 자기팀의 한 여성대원은 에베레스트 등반을 다녀 왔는데 베이스캠프에서 오직 2,000미터 정도 밖에 오르지 못했다고 웃으면서 그 대원을 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나는 엄지 손가락을 세우면서 원더풀이라고 하자 그녀는 수줍 은듯 얼굴을 숙이며 씨익 웃었다. 나는 배낭을 열고 남은 간식을 한줌 가득 꺼내서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아주 고마워하며 자신들의 간식도 한줌 꺼내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그래도 우리 동양인들은 대다수 산위 에서 종족과 국가를 초월해서 서로 협력하고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사진을 더블 클릭하면 더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폭풍설을 헤치고 등반하는 모습 무시무시한 커니스 통과 지역 일본산악인들과 기념촬영

한참 휴식 후 정오쯤 우리는 일본팀들과 작별을 하고 다시 하산하기 시작했다. 선두가 하산루트를 잘못들어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러셀하며 트레버스하여 겨우 올바른 길로 들어섰다. 아침을 새벽 6시에 먹어서 그런 지 시장기가 돈다. 선두 2명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고얀놈들 점심도 안먹이고 어디로 사라졌는 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약간 완만한 곳에 대원들을 대기 시키고 점심을 먹도록 지시했다. 잠시후 두 일형이 나를 불러서 가보니 손가락에 심한 통증이 있다고 해서 장갑을 벗기니 맙소사 동상의 전조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시커멓게 변해가는 걸로 보아 최소한 2도 이상의 동상이 걸린것 같다. 지금 이 상황에은 빨리 내려가는 길외엔 별 치료방법이 없다. 나는 비상용으로 보관해둔 울 벙어리 장갑을 꺼내 두 일형에게 끼도록 한후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오후 2시쯤 드디어 능선길 하산을 끝내고 계곡등산로에 도착했다. 좌우로 길이 나있었는데 앞선 대원들이 먼저 오른쪽으로 가다가 한명의 일본 산악인을 만났다. 그 래서 신호타카를 물으니 반대편이라 이야기 하면서 리더를 불러달라고 한다고 해서 가보니 어디로 가느냐고 영어로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등반을 마치고 신호타카 온천으로 하산하는 길이라 하니 자기도 야리카다케 등반을 마치고 신호타카로 하산하는 중이란다. 나는 이곳에서 신호타카 온천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느냐고 물으니 약 2시간이면 도착할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의외로 놀랐다. 내 판단으로는 적어도 3~4시간은 걸릴줄 알았는데 2시간만에 도착할수 있다고 하니 반신반의 하면서 그 친구와 같이 하산하기로 하였다. 그의 이름 은 유키히라 오자와였는데 나이는 37살이며 토오쿄오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직 결혼하지 않은 총각이라고 하였다.

※ 사진을 더블 클릭하면 더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등반대장과 일본 산악인 유키히라 등반중인 일본 산악인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대원들과 유키

약 20여분 내려가다 보니 2년전 우리가 악천후로 필사의 탈출을 하여 하산하면서 만났던 시라다시 대피소가 나타났다. 그때와 지금은 느낌이 틀리다.^^ 오후 2시 40분쯤 호타카히라 산장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하였다. 호타카히라 산장은 유인산장이며 숙식도 할수 있는 산장이다. 하지만 너무 낮은 곳에 위치하여 산악인들은 잠시 경유하며 소수의 스키어들만 이용하는 듯 하다. 오후 4시가 다되어 드디어 출발점인 신호타카 온천에 도착했다. 나는 비로소 긴 안도의 한숨을 내 쉴수 있었다. 일본인 유키가 자기가 맥주를 한잔 산다고 버스터 미널 2층 식당에 가자고 한다. 나는 무사히 하산도 했고 해서 그를 따라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잠시후 대원 들이 모두 하산하여 2층 식당에 모여 간단히 맥주로 축배를 들었다. 유키는 이러한 우리모습이 아주 부러웠 는지 연신 디지털 카메라를 눌러댄다. 병맥주 11병이 개눈 감추듯 없어진다. 더 마시고 싶지만 아직 막영지 도 정하지 않고 해서 자제를 하고 내려왔다. 일본내에서도 맥주는 다른것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었다. 나는 입산신고소에 하산완료 신고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다테야마 산장 노운석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은 외출하시고 사모님이 대신 전화를 받았는데 무사히 등반을 끝냈다고 하니 자기일처럼 기뻐했다. 일단 저녁에 노운석선생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통화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버스터미널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빨리 온돌화장실 관리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가 되니 버스터미널 대합실도 폐점한다고 모두 나가라고 했다.

※ 사진을 더블 클릭하면 더 큰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등반성공을 자축하며 Cheers! 손과 얼굴에 동상이 심한 대원 따뜻한 온돌이 깔려 있는 베이스캠프

얼마 후 관리인이 퇴근하자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온돌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 곳은 지난 번에 이곳에 등반왔을 때도 사용했던 우리의 단골 베이스캠프이다^^. 단 한가지 단점은 아침 7시전에 일찍 짐을 챙 겨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장비를 대강 정리하고 자리에 앉자 말자 술판 이 벌어졌다. 일본인 유키도 이에 질세라 캔맥주, 정종등 술을 열 병이나 사 가지고 왔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하고 데포시켜둔 소주와 삼겹살, 김치를 꺼내서 찌게를 끓이고 해서 맛있게 먹었다. 유키 그친구는 한국음식을 잘 먹는 편이었다. 그 독한 몇치젓갈도 스스럼없이 먹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몇치 젓갈만큼은 일본인들도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는데 유키히로는 예외이다. 나는 다시 다테야마 노운석선생님에게 전화를 하였다. 노 선생님께서 다테야마에서 신호타카까지 너무 멀기 때문에 가능하면 마쓰모트로 버스를 타고 나 오면 좋겠다고 해서 유키한테 물어보니 마침 자기도 마쓰모토로 가서 신간센을 타고 토오쿄오로 간다고 한 다. 의외로 이번 등반은 모든일이 잘 풀린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두일형이 손가락에 수포가 생겼다고 하신다. 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상태를 살펴보니 2도정도의 동상이다. 또한 상표녀석도 손과 발 에 동상이 제법 심한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동상연고를 바르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른 대원들도 거의다 얼굴에 1도 정도의 동상을 입고 멀쩡한 사람은 딱 한사람 나 뿐이다. 나는 스키고글이 성 에가 끼어 아예 끼지도 못했지만 운좋게 얼굴에 전혀 동상이 걸리지 않았다. 동상이 걸린 대원들은 서로 얼굴을 서로 쳐다보면서 킥거리며 웃고 난리다. 얼굴이 몇 군데씩 흑인처럼 시커멓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나게 떠들고 웃으며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퍼 마시다가 밤 10시쯤 모두 나가 떨어진다.
출처 : 자연과 삶의 향기
글쓴이 : 피츠로이 원글보기
메모 :